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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Sep 05. 2019

저를 택배로 보내주세요! 빨리..

테오도라 #16 너를 보내고 다시 100일을 맞이하며..


아주 오래된 기억

     

테오도라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라도 이 오래된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 했다. 경찰서의 사망 조서 작성 때에도 숨기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정확한 사망원인을 밝히는데 혹시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23년 전의 일을 조서를 작성하는 여경에게 고해성사하듯이 자백하고 말았다.

     

90년대 후반의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IMF 외환위기 전인지 후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은 점심을 먹고 남산까지 가서 산책을 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오후 3시쯤으로 기억된다. 갑자기 나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받았다. 휴대폰을 통해 사람 살려달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잘못 걸려온 전화이거나 누가 장난치는 줄 알고 끊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오빠 나야 나!라는 소리에 나는 테오도라라는 것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일이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약을 먹었다고 대답하였다. 너무 고통스럽다고 살려달라는 소리만 반복하며 울고 있었다. 어디냐는 나의 질문에 집이라고 하였다. 나는 집주소를 알려 달라고 하고 119에 주소를 알려주고 응급환자 발생이니 빨리 출동해 달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상사에게 사실을 알리고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빌딩 1층으로 내려갔다. 택시와 퀵서비스 오타바이들이 한가롭게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퀵서비스 오타바이를 택하였다. 상도동까지 10분 안에 가면 요금의 5배를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벌금고지서가 날라 오면 별도로 청구하라고 명함까지 주고 출발하였다. 정말 10분도 안되어 테오도라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서 구토를 하고 있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응급조치는 없었다. 빨리 병원에 가서 위세척을 해야 한다고 테오도라가 알려줄 뿐이었다.


그 당시에도 그녀는 간호원이었다. 지금은 간호사로 호칭이 바뀌었지만 그때에는 간호원이라고 하였다. 기다려도 앰뷸런스는 오지 않았다. 대기 중이던 퀵서비스 아저씨에게 택시 좀 불러오라고 하자 바로 택시를 불러왔다. 나는 테오도라를 업어서 집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가장 가까운 큰 병원으로 달려갔다. 위세척을 하려면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기사님의 조언을 따랐다. 택시는 5분도 안되어 집에서 조금 떨어진 병원에 도착하였고 병원 응급실에서는 위세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위세척은 시작되었고 테오도라의 친오빠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동생은 저녁이 다 되어서 병원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였다. 그 사이 퀵서비스 기사는 다시 사무실이 있는 빌딩으로 돌아가서 나에게 언제 오냐고 물었다. 나는 사무실로 찾아가 나의 직장상사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주며 5만 원을 받으라고 하고 바로 상사에게 퀵서비스 기사가 오면 5만 원만 나 대신 지급해 주면 다음날 출근해서 드리겠다고 하였다. 나의 직장 상사는 뭘 어디로 보냈기에 5만 원짜리 퀵서비스가 있냐고 물으셨지만 나는 나중에 설명드리겠다고 하고 무조건 지급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저녁 6시쯤 테오도라의 친오빠는 달려왔고 우리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며칠 입원해서 경과를 봐야 한다고 하셨다. 테오도라는 바로 입원하였고 그다음 날 퇴원하였다. 다행히 응급처치가 잘되어 장기 손상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복용한 것은 수면제였고 생각보다 많이 먹어서 나도 의사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테오도라는 힘들다고 생각될 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하였고 나는 그때마다 무슨 일이야!! 하며 놀란 토끼처럼 전화를 받았다.



주인 잃은 우편함의 우편물들

     

얼마 전 금요일 오후였다. 삼성동 연구소에서 같이 사업을 하는 오 대표와 같이 테오도라의 집에 다녀왔다. 금요일 오후의 태양은 강렬하다 못해 차의 유리창을 뚫고 들어올 기세였다. 차는 에어컨을 가장 세게 켜 놓아도 그 더위에 맞서는데 힘겨워하고 있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내비게이션은 삼성중앙역에서 한강 다리를 건너 강변북로로 안내하고 있었다. 강변북로도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금요일 오후이기는 하지만 휴가철의 정점이어서 막히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빗나가고 있었다. 한강 다리를 넘고 상토 터널을 지나자 김영삼 도서관이 나왔다. 우리나라 3김 중 하나인 YS의 집 근처를 지나 한참을 더 올라가야 했다. 거의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다시 내리막을 약간 내려오자 테오도라가 살던 집이 나왔다. 동네 분위기와는 달리 집은 상당히 깔끔해 보였다. 주위는 모두 4층짜리 빌라와 연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각자 집주인들이 재개발을 한 상태라는 뜻이다. 1층은 전체가 주차장이었고 2,3층은 방이 2개씩 4층은 방이 하나로 된 구조였다.

     

그녀가 살던 건물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선뜻 들어가서 그녀의 흔적과 자취와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오빠로서 전혀 자격이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집 주위를 서성이다 1층 현관 밖 입구에 있는 우편함을 보았다. 401호에는 커다란 우편물 두 개와 하나은행에서 날라 온 작은 편지 하나가 꼽혀 있었다. 세부 내역도 없었다. 6만 원도 안 되는 8개월째 연체 중인 신용카드 체납금이었다.  커다란 우편물 두 개는 같은 데서 보낸 것으로 개명 전의 테오도라와 개명 후의 테오도라 이름으로 도착해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보냈는데 수취인이 없어서 반송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시 회색 대 봉투에 재포장을 해서 다시 보냈다. 개명 전의 이름과 개명 후의 이름으로 보냈다가 반송되기를 두 차례나 했으니 네 번이나 오간 셈이었다. 하나를 뜯어서 내용을 살펴보니 인근에 임대 아파트가 세 가지 형태의 평수로 나와 있으니 7월 중순까지 신청하라는 내용이었다. 입주는 내년 여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테오도라는 이미 아파트에 들어가려고 신청해 놓은 상태였던 것 같다. 달동네 같은 곳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였을까? 아니면 아파트가 편리해서였을까? 아무튼 그녀는 내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삶의 의지가 어느 정도 죽음을 뿌리치고 남을 정도는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 우편함과 우편물을 보면서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지만 견딜 만하였다. 이미 모든 것이 종료된 상황이어서 더 이상 의미 없는 일들로 의미 없는 감정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해지려 노력할 것이다. 4층에 올라가서 그녀의 방을 구석구석 둘러보아도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도록 계속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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