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은비야,
아빠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빠는 부자가 아니라서
스무 살 때까지 학원은
너희가 두 개만 선택할 수 있다”
라고 말하던 거 기억나지?
네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직 스스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선택하기 어려운 나이였지.
그래서 아빠가 대신 골라준 두 가지는
수영과 피아노였어.
수영은 단지 ‘생존’ 때문만은 아니었어.
바다가 품고 있는 넉넉한 세계—
수영, 윈드서핑, 스킨스쿠버, 다이빙까지—
그 풍요로움을
네가 마음껏 누렸으면 했거든.
아빠는 수영을 못해서 제주에 5년을 살았으면서,
그 세계를 온전히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피아노는,
삶이 각박해질 때
예술이 사람을 얼마나 위로하는지
아빠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
중학생이 되면
그만두어도 괜찮아.
하지만 피아노를 통해
네 삶에 스며든 감정의 선율이
언젠가 너를 조용히 채워줄 거라고
아빠는 믿고 있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너희 셋이
매달 첫째 주에 책방에 가서
책 한 권씩 고르던 작은 의식도
사실은 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거야.
책방의 온기를 느끼고,
그 시간의 설렘을 기억하고,
스스로 책을 고르는 경험들이
너희 삶을 더 넓고 깊게 만들길 바랐어.
그래서인지 너는
책을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눈을 갖게 되었지.
얼마 전 네가
읽은 책의 즐거움을 이야기해 주던 날,
아빠는 정말 놀랐어.
아빠는 소설 읽을 때
인물 이름 외우는 것도 늘 어려운데 말이야.
그 모습을 보며 참 좋았어.
얼마 전 선생님께서
“은비가 수학을 더 잘할 수 있는 아이인데,
공부를 조금 더 신경 써 주세요.”
라는 문자를 보내셨을 때,
아빠 마음도 잠시 흔들렸어.
하지만 곧 생각이 제자리로 돌아왔단다.
초등학생일 때까지는
점수 몇 개에 함몰되기보다
자연 속에서 즐겁게 뛰어놀고,
문학과 예술, 그리고 수영을 통해
삶을 넓고 깊게 경험하길 바랐어.
수학 한 문제보다
삶을 향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하다고 믿었어.
적어도 초등학생일 때까지는
한국 교육의 경쟁 속에
가두고 싶지 않았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며칠 전 아빠가 읽은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가
떠오르더구나.
저자 패트릭 브링리는
뉴욕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일하던 중,
암으로 투병하던 형을 잃게 돼.
형의 죽음 앞에서
지독한 무력감을 겪은 그는
화려해 보이는 뉴요커의 삶을 떠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지.
10년 동안 반복되는 미술관의 일상 속에서,
그는 매일 예술 작품과 함께하며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아픔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돼.
아빠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장면은,
큰아들을 잃은 패트릭의 어머니가
니콜로 디 피에트로 제리니의 피에타 그림 앞에서
얼굴을 감싼 채 울고 있던 순간이었어.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어.
“그 그림이
어머니 안의 사랑을 깨워
위안과 고통
둘 다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p.67)
아빠는 그 문장을 오래 붙들고 있었단다.
예술이 사람에게 어떤 힘을 주는지
다시 깨닫게 된 순간이었어.
은비야,
문학과 예술은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 주고,
네 마음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들이야.
삶에서 자주 마주하게 될 슬픔 앞에서
예술은 너를 위로해 주고,
또 너를 성숙하게 만들어 줄 거야.
아빠는 네가
예술 앞에서 잠시 멈춰 설 줄 알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아빠는 지금 새벽,
피아노 앞에 앉아
이 편지를 쓴다.
은비가
아빠보다 더 넓고 깊은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2025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새벽,
피아노 앞에서,
사랑하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