숀탠(Shaun Tan), < 도 착 (The Arrival) >
사랑하는 은비야.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그림작가 숀탠의 《도착》이라는 책을 들고 왔어. 아빠가 만약 책방을 한다면 책장 한켠에 그의 그림책을 꼭 두고 싶어. 누군가에게 조용히 건네고 싶은 책이기 때문이야.
이 책에는 글이 한 줄도 없어.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들려온단다.
한 남자가 가족을 두고 낯선 나라로 떠난다.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마침내 어느 낯선 땅에 도착한다. 그곳은 그가 살아오던 세계와 전혀 다른 곳이었어. 언어도 다르고, 건물도 다르고, 사람들의 표정도 낯설지. 그는 그곳에서 아무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이 된다.
아빠는 이 책을 보다가 한 장면에서 오래 멈추었어. 바다 위를 향해 있는 여객선의 작은 창문들이었어.
멀리서 보면 배는 하나의 점처럼 보이지. 하지만 가까이 보면 그 배에는 수많은 작은 창문들이 빼곡히 있어. 그리고 그 창문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지.
각자의 방,
각자의 이야기,
각자의 고독.
그 작은 창문 속에는 바다를 건너는 수많은 삶이 담겨 있단다. 아빠는 그 장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고독을 저 거대한 여객선처럼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고독은 거대한 배 전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창문 속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눈빛 속에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방인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이방인이 되어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방인의 고독을 느낄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꽤 오랫동안 내 고독을 해결하는 일에만 마음을 써 왔던 것 같아.
어떻게 하면 덜 외로울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평안해질까.
치열한 삶 속에서 그 생각만으로도 아빠에게는 벅찬 일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일까. 세상 어딘가에서 더 깊은 고독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충분히 바라보지 못한 채 지나온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래서 가끔은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많아. 정작 나는 그들의 고독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면서 이렇게 감성적인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야.
하지만 아빠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아빠가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삶일지도 모른다고.
익숙한 세계 속에 살면서도 그 안에서 낯섦을 잃지 않는 것. 익숙한 거리 속에서도 타인의 고독을 조금이라도 느끼며 살아가는 것.
헨리 나우웬은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어. 나 역시 상처를 입은 자로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조금 더 이해하려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이야.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아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타인의 아픔을 향해 조금 더 마음을 여는 사람.
사실 아빠 안에는 오래도록 해결되지 못한 결핍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와 너희들을 만나면서 아빠의 삶에는 안전한 울타리가 생겼어. 돌아갈 집이 있고, 함께 웃을 사람들이 있고, 서로를 붙잡아 줄 가족이 있다는 것. 그것은 아빠에게 참 큰 은총이었다.
하지만 요즘 이런 생각도 들어. 이 울타리가 나를 지켜주는 곳이 아니라, 나를 고립시키는 울타리가 되지는 않을까 하고.
그래서 아빠는 이런 상상을 해 보곤 해. 이 울타리에 타인을 향한 작은 문 하나를 만들면 어떨까 하고. 아주 거창한 문이 아니라 아빠 삶의 크기에 맞는 소박한 작은 문 하나라도.
그 작은 문을 통해 누군가의 고독이 잠시 머물 수 있고, 그 문을 통해 아빠의 마음도 조금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열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
아빠에게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울타리를 허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울타리에 타인을 향한 작은 문을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이렇게 아빠는 오늘도 조심스럽게 배우고 있단다..
나를 향한 고립된 고독에서, 타인을 향한 아름다운 고독으로 조금씩 걸어가는 삶을 말이야. 오늘 우리 마음의 울타리에 작은 문 하나를 함께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