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에 집착하지 말고 그저 사고회로를 끊어내보자
지난 주에 나는 피할 수 없는 모임에서 그를 보았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지 않게 그는 나를 티가 나게 '거부'했다. 나와 다른 일행들은 넓은 들판 같은 곳에 있었고 그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본 일행들이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 역시 손을 들었다. 나는 일행들이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린 후에 손을 들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들자마자 그는 들었던 손을 내렸다. 남들에게는 크게 의미있게 비춰지지 않을 행동을 나는 분명한 '거부'의 의사로 해석했다. 실제로 다가온 그는 나에게는 한 마디도 걸지 않은 채 다른 이들에게만 친근하게 다가가고 이야기를 했다. 나 역시 그에게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을 해도, 그는 다른 이들에게와는 다르게 굳은 표정과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하거나 무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내가 상처 받을 것을 알기에, 나는 말하지 않았다.
모임 내내 불편한 기분을 견딘 후에 나는 그래도 인사는 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다가가서 인사했다. 그는 역시나 내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돌아오면서 그래도 인사를 했으니 내가 할 것은 해냈다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한 주가 지난 오늘까지 나는 그 생각에 얽매여서, 그의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딱히 상황을 바꿀 묘안은 떠오르지 않는다. 모든 사정을 아는 내 친구는 '너는 사과도 했고 할 것을 다 했으니 더는 다가가지 마라. 너에게 상처가 된다'고 충고했고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의 마음을 풀어주기에는 나도 너무나도 화가 나는 상황인데, 그렇다고 토라져서 말도 안 하는 그에게 다가가서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따졌다가는 더 싸우자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그렇게 하면, 그는 울면서 제가 오히려 피해자인 양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것이다.
그에 대한 분석은 하고 또 해왔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의 특성과 그의 특성이 너무 일치해서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는 제가 지적을 받은 일을 굳이 단톡방에 이야기하면서 공개 사과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지적을 한 사람은 드러내지 않은 채였으나, 그것을 보았을 때 지적한 사람이 얼마나 민망해하고 죄책감을 느낄지는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모임에서 자주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꺼냈으며, 충고를 해도 그저 '나는 너무 힘들다'고 대꾸해서 충고하는 이들을 힘이 빠지게 만들었다. 전에는 아이가 한 말을 가지고 걱정을 하길래, 그것은 오히려 아이에게 좋은 징조일 수 있고 커가면서 긍정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그렇게 말하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신의 아이를 긍정적으로 해석을 해 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좋게 말해주어서 고맙다."고 대답한다. 순간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아이를 좋게 바라봐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너무도 이상해서, 나는 '내가 뭔가 실수한 건가' 싶어서 그 후에는 그가 어려움을 말해도 쉽게 뭐라고 말을 하지 못했었다.
그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든 그 외 다른 어떤 성격장애를 지녔든 혹은 아니든, 그가 순간순간 보였던 태도와 말이 다른 사람과는 많이 달랐던 것은 사실이었다. 유독 그를 만나고 오면 기분이 찜찜했다. 무언가 더 말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 속에 빠져서 다른 이의 생각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판 웅덩이에 몸을 담은 채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성장할 수록 아이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고 고민거리도 달라지기 마련인데,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대개 부정적이었다. 때로 아이가 이런 말도 했다며 자랑을 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비관, 불안, 우울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그것의 결론은 딱히 없었다.
얼마 전, 나는 그가 아닌 다른 엄마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를 A라고 하고 다른 엄마를 B라고 하겠다. B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B가 실은 금전적으로 치명적인 손실이 있어서 매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B는 도통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나는 매우 놀랐다. B는 오히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를 해주는 편이었다. A와 B,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만났을 때 A는 평소와 같이 하소연을 했고 B는 그 상황에 위트를 더해서 위로해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꽤나 즐거운 모임을 할 수 있었고 A도 말하면서 웃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는 B도 A가 말한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였다. B는 그 어려움을 이제야 나에게 밝히면서 그럼에도 남편과 다투지 않고 오히려 서로의 잘못을 고백하며 협력하여서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B의 얼굴에서는 고통과 불안은 없었다. 나는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A를 위로할 수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A는 자신이 봉착한 어려움, 솔직히 그것을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제가 만들어낸 '결계'안에 저를 가두고 끊임없이 '나는 불쌍한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어필하고 있다. 내가 그와 틀어지기 전에 그를 보면 답답했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당신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의 아이는 훨씬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아이라는 것도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오히려 굉장히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B는 자신이 봉착한 어려움을 타인에게 쉽게 말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든 이겨내가는 사람이다. 그의 말과 태도에서, 누가 보아도 엄청난 어려움인 그의 상황은 그에게는 어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아이를 돌보면서도 또 따로 일을 구해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아이가 몇 년 전과는 다르게 놀랍도록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B의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
나는 다시 내게 봉착한 어려움을 본다. 나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나는 거부에 대해서 진절머리가 나도록 싫은 사람이다. 하지만 아이의 어린이집은 바꿀 수가 없고, 그와는 필연적으로 계속 만나야 한다. 때로 모임 안에서 깊은 이야기를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때에 나는 그가 나를 무시하는 눈빛, 인사를 해도 쳐다보지 않는 태도, 말을 시켰을 때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며 대답하는 태도 등을 견뎌야 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내 심장박동은 저절로 빨라지고, 호흡은 가빠지며, 마치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공격당할 때 오는 스트레스가 높아진다. 하지만 그럴 일일까. 내 상황은 실제적인 경제적인 타격을 입은 B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물론 사람마다 스트레스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내가 B의 상황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불안 수치가 높은 사람이다. 이 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자주 불안해했다. 운전을 몇 년을 했지만 여전히 운전대를 잡으면 사고가 나지 않을까 불안해했고(사고는 단 한 번, 그것도 주차된 차를 박는 어이 없는 실수 한 번이 전부였지만), 여러 사람이 있는 모임에 가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서 불안했으며, 누군가 나를 보면서 속닥거리면 혹시 내 욕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불안해했다. 아이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그러다가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서 따돌림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불안해했고 누군가 무슨 말이라도 하면 그 말이 사실이 될까 봐 불안해했다. 내 삶은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것은, 꼭 내 사고 회로가 어떤 일이 발생하든 불안과 걱정 근심으로 연결되는 회로여서인 것도 같다. 지금 <불안이라는 중독-저드슨 브루어 저>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습관 고리 이야기를 하면서 잘못된 습관 고리를 통해서 사람들이 계속 안 좋은 선택을 반복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는 습관 고리를 통해 계속 먹다가 결국에는 건강에 치명적인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불안이라는 잘못된 습관 고리를 통해서 내 삶을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 역시, 내가 만든 결계 안에서 그것이 안전하다 믿고 나오지 않는 선택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일은 큰 일이 아닌데. 누군가 나를 거부하는 일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엄청난 일이 아닌데, 그것이 마치 내 인생을 뒤흔들 큰 일이라도 되는 것마냥 사고하게 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스스로를 비난하는 쪽으로 자꾸만 사고 회로를 돌리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점점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고 회로는 끊을 수 있다. 단순하게는 그것을 안 하면 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담배를 핀다는 사고 회로를 끊기 위해서는 담배를 안 피면 된다. 담배를 피면 스트레스가 경감된다는 결과는 얻지 못하겠지만 담배를 안 펴도 살만하다는 다른 결과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미움을 받아서 죽을 것 같다, 내가 미움을 받으면 큰일난다는 생각의 회로, 습관적으로 이어져 온 그 회로를 끊어내고 '이건 그냥 내 뇌가 습관적으로 하는 생각일 뿐이다'라고 치부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면, 어느 순간 그것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될 수도 있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서도 스트레스를 다스릴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불안과 걱정 근심을 가지지 않고도 이 상황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