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째
감옥에 간 적은 없지만, 자유를 제한받았던 적이 있다. 좁은 방에 갇혀서 계속 누워 있어야 했다. 샤워도 3-4일에 한 번 10분 정도만 가능했다. 밥도 주는 것만 먹고, 옷도 주는 것만 입으면서 그렇게 누워서 버틴 시간은 3주를 꼬박 채웠다. 나는 그때 사람이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자유’였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 그것을 잃어보니 얼마나 소중한지 비로소 알게 되었었다.
임신 32주차를 넘어서고 있었던 때였다. 병원에서는 체중조절을 제외하고는 크게 조언하는 것이 없었다. 임신 기간 동안 체중이 많이 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어려운 것이 없었던 나는, 출산도 아무 일 없이 잘할 줄 알았다. 그렇게 아닌 밤중에 난리가 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밤이었다. 30주에 들어서면서 종종 배뭉침이 있었다. 주기적인 것이 아니면 괜찮다고 병원에서 그랬으므로, 배뭉침이 있으면 누워서 안정을 취했다. 32주차를 넘어선 그날도 새벽에 배뭉침이 있어서 조용히 누워서 그것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뭉쳤다 풀어졌다, 뭉쳤다 다시 풀어졌다 뭉쳤다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거 주기적인 거 아니야?’ 어플을 실행시키고 주기를 체크해 보니 5분 간격이었다. 출산 직전에 이렇다던데. 당황한 나는 자는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별일 아닐 거라고 하면서도 옷을 입고 병원으로 갈 준비를 했다.
“어차피 병원에서 별일 아니라고 할 거야.”
이제까지 호들갑 떠는 것은 내 담당이었고, 아니라며 안심시키는 것은 의사 선생님 담당이었다. 임신 극초기에 자궁에 피가 고여 있었고, 그것이 흘러나오면서 유산인 줄 알고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의사는 초음파로 자궁에서 잘 놀고 있는 아이를 보여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임신 중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늘 질문을 쏟아내는 나에게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의사를 나는 점차로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지레 짐작했다.
병원에서는 바로 내 몸에 자궁 수축을 진단하는 장치를 연결했다. 별일 아니야, 수축이 아닌데 내가 예민해서 그렇게 느낀 거겠지. 기계는 정확하니까 아니라고 하고 집에 돌려보낼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래프를 바라보는 간호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진짜로 자궁 수축이었다. 그것도 내가 잰 대로 5분 간격. 이대로 가면 출산을 할 수 있고, 33주에 태어난 아이는 아직 폐가 완전하지 않아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다. 나는 자궁 수축을 억제하는 약을 맞았다. 내 몸에는 환자복이 입혀졌고, 어이없게도 바로 입원 수속을 하게 되었다.
“많이 있는 일이에요. 2-3일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하게 될 거예요.”
나를 늘 안심시켰던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늘 괜찮은 그에게 이번 자궁 수축은 괜찮지 않은 것이었다. 입원이라니. 무슨 이런 날벼락 같은 일이 있을까. 나는 그때까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은 없었다. 다섯 살 때 장염으로 입원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기억에 없고 그저 전해 들은 말일 뿐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는데, 다행히 1인실에 해서 다른 환자를 신경쓸 필요는 없었지만 혼자 골방에 갇혀 있으니 굉장히 불안했다.
대체 나는 왜 조기 진통이 온 것일까. 이틀 전에 받은 마사지가 문제가 되었던 걸까. 하지만 그 마사지가 아무리 문제가 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잖아. 나는 바보 같이 마사지를 왜 받았지, 그냥 몸이 답답해도 참을 것을 그랬지. 늘 받던 데가 문이 닫아서 다른 곳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유독 좀 세게 마사지를 하긴 했지. 아니, 그 원인이 아닐지도 몰라. 그 전에도 배뭉침은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이가 32주에 태어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떤 경우를 보니까 폐가 완전히 자라지 않아서 수술을 했다고 하던데. 32주의 그 작은 아이가 수술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33주 출산을 네이버 검색어에 넣고 계속 관련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출산을 했더니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은 다 달랐다. 괜찮았던 아이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던 아이 그리고 수술을 받아야 했던 아이. 나는 최악의 결과를 상상하면서 더 불안해졌다. 불안이 증폭되니 우울해졌다. 남편은 병원으로 퇴근을 해서 나와 같이 저녁을 먹긴 했지만 나의 우울을 살뜰히 달래주는 성격은 못 되었다. 그래, 그래도 3일만 견디면 되잖아. 생각했지만 상황은 내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3일은 더 있어야 겠네요.”
퇴원하기로 한 전날, 또 배뭉침이 있어서 검사를 받으니 주기적인 배뭉침이 진단되었다. 약을 맞아도 배뭉침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다. 의사로부터 선고를 받은 나는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더 증폭이 되는 것을 느끼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러다가 출산해도 되는 시기인 3주 후까지 병원에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정말 싫은데. 병원에서는 최대한 누워있으라고 했으므로 병원 주변을 산책도 할 수 없었다.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 누워만 있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것도 편안한 마음이 아니라 불안을 잔뜩 끌어안은 채.
나의 우울은 점점 더 커졌다. 남편이 자는 밤에 혼자 화장실에서 울기도 했다. 그리고 정점을 찍었을 때는, 남편이 어머니 추도 예배 때문에 시골에 다녀와야 한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래도 남편이 함께 있어서 겨우 버틸 수 있었는데, 나 혼자 이 작은 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망스러웠다. 꼭 가야 하냐고, 어떻게 나를 버리고 갈 수 있냐고 울면서 말하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안 가겠다고 말을 했지만 그럼에도 서운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남편은 나의 상황을 모르는 걸까, 내려갔다가 내가 출산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 남편은 내가 아닌 자기 원가족이 우선인가 싶어서 계속 구시렁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그저 나의 불안과 우울이 남편에게 투영이 된 것이었는데, 그때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남편만 원망스러웠다.
결국 나는 3주 후에, 출산을 해도 괜찮을 36주가 되어 퇴원을 했다. 이제 배가 뭉치면 출산하러 오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3주 만에 사복으로 갈아 입었다. 오래 누웠던 침대와 베개가 문득 정겹게 느껴졌다. 끼마다 먹었던 샐러드도, 맛있는 반찬들도. 내내 보았던 ‘짠내투어’ ‘맛있는 녀석들’도. 끝나고 나니, 왜 그 3주 동안에는 그토록 불안하고 힘들어하면서 지냈을까 싶기도 했다. 불안해해도 불안해하지 않아도 달라질 것은 없는데. 차라리 출산 전에 몰아서 쉰다 생각하고 누워서 텔레비전 보면서 논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였는데. 불안과 우울을 버리지 못한 채 혼자 구렁텅이에 잠겨 버린 그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그 좁은 방에서, 텔레비전을 벗하며 보낸 그 침묵의 시간들이. 삼시 세끼 주는 밥을 먹으며 사육되었던, 그 자유가 없던 날들이. 추억처럼 떠올려 보지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때이기도 하다. 나중에 혹 그럴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다인실을 가야 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옆에서 함께 고생하는 사람이 있으면 좀 나을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감옥도 독방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방이 좀 더 나은 이유가 그런 이유 때문인 듯도 하다.
그래도 그때가 지금은 추억이 되었다. 때로 괴로운 날들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고,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괴로웠던 그 순간도 버틸만했던 때로 다르게 기억되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도, 지나고 보면 또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서 잘 살아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