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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나비 May 21. 2022

요플레가 고소해.

놀이를 통해 성장하는 아이

나는 아이와 놀 줄 모른다.

이것을 나는 이제까지 인정하기 싫어했다. 나는 한때 교사였었고, 아이들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집에 놀러 가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를 좋아했다. 내가 이상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니까. 아이가 하는 말을 다 들어주고 호응해 주니까. 

그런데 정작 내 아이에게는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잠깐 보는 것과 계속 같이 사는 것은 분명히 달랐다. 피곤해 죽겠는데 언제까지나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할 수는 없었고, 자고 싶은데 끝도 없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도 없었다. 아이와 놀면 오 분이 다섯 시간처럼 흘렀다. 정말이지 나는 아이와 놀 줄 모르는 엄마였다.

나는 그저 아이와 함께 한 공간에 있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인 줄 알았다. 아이가 노는 것을 들으며 나는 휴대폰을 했다. 때때로 책을 가져 오거나 뭐가 필요하다고 하면 도와주고 나서 다시 내 할 일을 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도 많은 것을 하는 것이라고 자위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이는 그 사이 점차 혼자 놀기에 익숙해져 갔다. 어린이집에서도 혼자만 논다는 피드백이 왔다. 그제야 무언가 위기감이 들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가 노는 옆에서 나도 같이 놀았다. 같이 음식을 만들고 먹었다. 하지만 아이가 음식을 차리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냠냠. 맛있다."가 전부였다. 실제로 음식을 먹는데는 냠냠 맛있다는 말도 안 한다. 그냥 먹는다. 먹으면서 음식과는 상관 없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아이가 차린 음식을 그렇게 먹을 수는 없었으므로,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병원 놀이를 하면 아이가 치료해 주는 대로 나를 맡기는 것 외에 할 말이 없었다. "아이고 선생님 배가 아파요."가 끝이었다. 그러고 나면 아이는 진찰을 하고, 연고를 바르고(응?), 약을 먹이고, 체온을 재고(응?), 이제 다 끝났으니 가라고 한다. 

놀이 확장을 위해 인형들을 데려왔다. "아이고 선생님 저는 다리가 아파요." "아이고 머리가 깨질 것 같네." 인형마다 아픈 부위가 달랐다. 하지만 치료법은 똑같았다. 진찰을 하고 연고를 바르고 약을 먹이고 체온을 잰다. 나는 지루해 죽겠는데 아이는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치료를 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나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침묵하고 있는게 뭔가 잘못하는 것 같아서, "다리가 계속 아파요." "이번에는 소화가 안 되는 거 같아요."라고 하며 병을 계속 만들었으나 상황은 똑같이 흘러갔다. 

이게 맞나.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나는 계속 의문이 들었다. 나는 지루해 죽겠는 이 시간이 아이는 좋은 것일까. 나처럼 마지못해 하는 것인가.(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놀이가 싫었다면 진작 때려쳤을 테니.)

똑같은 놀이가 반복되던 와중에, 나는 좀 더 디테일해져 보기로 했다. 아이 보다는 내가 도저히 심심해서 이렇게는 못 할 것 같아서였다. 언젠가부터, 아이가 음식을 차려주면 나는 한때 '전지적 참견 시점'에 나온 이영자 씨가 하듯이 디테일하게 음식평을 했다. "오, 이 파프리카는 아삭아삭하고 달콤해. 씹으면 달콤한 향이 입안에 가득히 퍼져. 정말 맛있다." "이 바나나는 달고 부드러워. 씹으면 이가 바나나에 파고 들면서 그 부드럽고 향기로운 맛이 입안에 감돌아." 이런 되도 않는 소리를 해대면서 음식을 먹으니 아이가 더 즐거워하며 내게 여러 장난감 음식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일은 오늘 일어났다. 요플레를 먹던 아이에게 맛있냐고 묻자, "고소하고 맛있어."라고 말을 한 것이었다. 나는 그냥 맛있다고만 할 줄 알았는데. 고소하다는 말을 언제 익혔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내가 놀이하면서 한 말 같았다. 수많은 음식 맛을 설명하는 중에 섞여 들어갔겠지.

그 동안 놀이가 무슨 효과가 있을까 고민했는데, 뿌듯했다. 내가 하는 것이 아이에게 그래도 먹혀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아이가 어휘를 알고 발달하는 것도 좋았지만, 자신의 일상에서 그 놀이들이 표현이 되어 간다는 것도 기뻤다.

아이는 놀이로 자란다. 놀이를 통해 배우고 놀이를 통해 살아간다. 그 말을 다시 한 번 새기는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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