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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나비 Dec 22. 2020

엄마 짓다, 아빠 짓다.

아기가 말하는 우주의 언어

팔뚝만하게 태어나서, 얘가 과연 이 험한 세상을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걱정했던 아이가 벌써 24개월이 되었다.

이제 힘은 아빠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세어졌고, 밥도 남편 다음으로 많이 먹는다. 키는 또래보다 큰 편이고, 목소리도 우렁차다. 단, 말이 또래보다 조금 느린 것 같다.

아이는 걸음도 또래보다 늦게 걸은 편이었다. 빠르면 돌 전부터 걷는다는데, 이 아이는 돌 이후에도 걷지 못해서 무언가를 짚고 다니거나 기어다녔다. 그래서 좀 걱정을 했는데, 13개월부터 한두 걸음 걷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 싶게 뛰어다닌다.


느리게 천천히 하는 아이인가 보다 싶어서 말도 좀 기다려 주고 있고, 실제로 하나 둘씩 가능한 말들이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아이가 스스로 언어를 만든다는 것에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엄마 잘못이 큰 것 같다.

아이가 아직 '아빠'와 '엄마' 밖에는 못하던,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아이는 여러가지 음성을 입으로 만들어 냈는데 그 중에 '아뿌아'와 '아찌야'가 있었다. 이 두 말은 꽤 많이 해서 내가 그 말로 이야기도 만들어내었다. '아뿌아'는 달나라에 살고 '아찌야'는 목성에 산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정해졌다.

'아뿌아'와 '아찌야'의 이야기는 갈수록 확대되었다. 엄마의 직업은 못 속이는 모양인지, '아뿌아'와 '아찌야'는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거기에서 무시무시한 공룡을 만나기도 하고, 그러다가 둘이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기도 했다. '아뿌아'와 '아찌야'는 서로 사는 곳이 너무 멀어서 만날 수가 없는데, 그래서 아주 큰 자전거를 타고 목성에서 달나라로 간다.


그래, 나는 솔직히 아주 피곤했다. '아뿌아'와 '아찌야'를 말할 무렵 아이는 가정 보육 중이었고, 나는 아이와 하루 온종일 붙어 있으면서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뭐라도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그냥 되는 대로 이야기를 지어 붙였다. 아이는 아마 다 알아들을 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이야기 속 주인공이 '아찌야'와 '아뿌아'라는 것은 안 듯했다.


그로부터 한참을 그 말을 하지 않다가, 단어를 하나하나 배워나갈 요즘에 들어서 아이가 느닷없이 '아찌야'와 '아뿌아'를 소환했다. 그 아무 뜻도 없는 단어를, 하지만 엄마가 하나는 달나라에, 하나는 목성에 살게 해 주었던 존재를 아이는 기억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아찌야'와 '아뿌아'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실은 달나라에 사는 것은 '아뿌아'가 아니라 '아찌야'였고, '아뿌아'는 '아빠'가 모습을 바꾼 것이라는 놀라운 반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아이는 그 외에도 제가 말을 지어서 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하나가 '아빠 짓다'와 '엄마 짓다'이다. 도대체 '짓다'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남편은 그것이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인도네시아어라며 마음대로 갖다 붙였지만, 아이가 알면 기함을 할 일이었다. 아이는 그 뜻으로 그 단어를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짓다'는 아이가 표현하고 싶은 모든 것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아이가 무언가를 시도하다가 실패했을 때, 아이는 나를 가리키며 '엄마 짓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번역하면 '엄마가 해'라는 뜻일 것이다. 그냥 노래를 부르다가 '엄마'라는 말이 나와도 아이는 '엄마 짓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엄마가 나왔다'라는 말일 것이다.


아이는 결국 어른의 말을 배우게 될 것이다. 더는 달나라와 목성의 '아뿌아'와 '아찌야'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아빠 짓다'나 '엄마 짓다'와 같은 말을 했던 것도 잊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지구의 언어를 배우기 전, 말했던 이 우주의 언어를 아마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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