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매일 화가 난다
도서관에서 '엄마가 화났다'라는 그림책을 발견했다. 아이가 좋아할 것 같아 빌려서 책꽂이에 꽂아 놓았는데, 보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가 먼저 가져와서 읽어달라고 했다.
내용은, 엄마가 화를 내니 아이가 숨어 버렸는데, 엄마가 아이를 찾아 가면서 만난 요괴(?)들을 통해 아이의 마음을 깨닫고 나중에 사과를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어떤 점이 아이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요괴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지, 아니면 엄마가 화를 낼 때의 기괴한 그림인지, 아니면 나중에 서로 안고 사과하는 데서 느껴지는 안온함인지.
아이는 매일 그 책을 읽어달라고 했고, 나는 특별히 엄마가 아이에게 화를 내는 장면을 아주 실감나게 읽어 주었다.
엊그제 나는 아이에게 실제로 화를 냈다.
화를 냈다기 보다는 미친듯이 폭발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내 목소리가 내 목소리가 아니었고, 나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적은 작년인가, 한 일 년 전 정도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아이의 잘못이 아닌 것으로 미친듯이 화를 냈고, 아이는 무서워하면서 몸을 떨었다. 아이를 달래준 것은 남편이었는데 실은 내가 화가 난 것은 바로 이 남편 때문이었다.
엊그제 화가 난 것도 일정 부분은 남편의 탓이기도 했다.
아이는 하루 온종일 말을 듣지 않았다. 물론 아이라고 무조건 부모의 말을 듣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정도가 지나쳤다. 갑자기 나를 딱 때려서 때리지 말라고 하면 보란듯이 더 때리고, 위험한 장난을 치길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치고 하는 식이었다.
나는 결국 아이를 방으로 데려갔다. 위협과 설득과 애원을 하면서 제발 하지 말라고 했다. 아이는 그래도 방에 끌려 들어와서 이야기를 들으니 좀 무서웠던 듯이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아이를 풀어주었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였다.
아이는 밥을 먹었고, 숟가락으로 먹으라고 하니까 보란듯이 손으로 먹었고, 그래서 손에 기름이며 뭐가 다 묻어 버렸다. 남편은 아이의 손을 씻기라고 했다. 차려주는 것은 내가 보통 하는 반면 남편은 설거지를 했기 때문에, 그날도 남편은 설거지 준비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 날은 손을 씻길 수가 없었다. 아이와 하루 종일 실랑이를 한 화가 아직 가슴 속에 출렁이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나는 남편에게 손을 씻기라고 했다. 지금 너무 힘들다고. 그러나 남편은 자기가 설거지를 해야 한다며 끝끝내 내 요청을 거절했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손을 씻기러 갔다.
곱게 손을 씻을 아이가 아니었다. 비누와 물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처음에는 좋게 말했다. 두세번. 언성이 올라가도 아이는 히히 웃기만 했다.
"손 씻으라고 했잖아!"
결국 고함이 터졌다. 아이는 히히 웃다가 점점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채 나는 남은 화를 쏟아냈다.
설거지를 하다가 남편이 달려 나왔다. 그러게 빨리 좀 도와 달라니까. 남편은 아이를 다시 데리고 들어가 손을 씻으라고 했다. 아이는 울면서 손을 씻었고, 그런 아이에게 남편은 울지 말라고 다그쳤다. 나는 우는 아이한테 왜 그러냐며 남편을 내보내고 다시 아이의 손을 잡았다.
"화내서 미안해."
할 말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아이는 엉엉 울면서 나를 끌어 안았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 미워?"
"아니, 안 미워."
나와 아이는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 착한 아이였던 아이는 그 후로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도로 악동이 되었다. 무너진 것은 나였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엄마라고, 그냥 이대로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 아이 엄마라는 것인가. 감정 하나 다스릴 줄을 모르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마음 속을 부유했다.
나는 아이를 때리지 않는다. 아이에게 훈육을 목적으로 소리치지 않는다.(물론 내 화를 다스리지 못해서 소리친 적은 여러번이지만) 아이를 위협하지 않고 아이를 무섭게 만들지 않는다. 각종 육아서에서 다져진 이론은 때로는 머릿속에 소용돌이 쳤다. 체벌을 하면서, 무섭게 아이들을 위협하면서 아이를 잘 다스리는(?) 주변의 부모들을 보며,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처음에는 위협하며 무섭게 굴었던 남편도 지금은 한없이 자상하고 착한 아빠가 되었다. 내가 옆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변하지 않는다. 아이는 날마다 더 광포해진다. 내가 너무 맹탕이라서 그런가. 순하게 대해서 그런가. 내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주변에서는 백 마디 조언을 한다. 나는 조언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또 이대로 있는 것이 맞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내 속의 나와, 같이 사는 남편과, 아이를 동시에 키우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버겁다. 내 안의 다스려지지 않는 나라는 존재도, 때로는 아이보다 더 이상해 보이는 남편도, 그리고 이상한 것이 당연한 다섯 살 아이도. 견디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기다려주는 시간 역시 필요할 것이다. 때로는 그런 생각도 한다. 내가 잘못 키워도 요즘은 상담이 잘 되어 있으니까, 커서 상담 받으라 하지 뭐. 무책임해 보이는 생각이지만 엄마가 되니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할 그릇은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억울하다. 당연히, 엄마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 아이의 부족함? 아이의 자질? 아이의 행동, 습관? 이런 걸 일일이 파악하고 아이에 따른 적용을 하려면 모든 엄마들은 정신과 의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모든 엄마들이 정신과 의사가 될 수 있도록, 정신과나 상담가에게 접근할 수 있는 문턱을 낮추어 주어야 한다. 지금처럼 지자체에 따라 상담을 받을 수 있는 회기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나 아빠라면 누구든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금쪽 같은 내 새끼>에는 아이의 잘못은 다 엄마나 아빠의 탓이라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부모만이 아니다. 그 부모의 부모, 그리고 부모를 둘러싼 환경, 아이를 둘러싼 환경 모두 아이를 키운다. 하지만 책임지는 것은 부모만이다. 그 무게가 너무 무겁고 힘겹지만 다른 사람들은 들어주거나 필요없는 조언을 해줄 뿐이다. "힘들구나. 토요일에 두 시간만 맡기고 놀다 와." 이렇게 말하는 지인들은 거의 없다. 물론 맡긴다고 갈 아이도 아니고.
엄마가 화났다. 아이에게도 화가 나지만, 이런 시스템 속에서도 화가 난다. 아이를 부모가 키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풍조, 그리고 아이의 여러 어려움을 부모 탓을 하는 분위기. 그 모든 짐을 떠안고 괴로워하는 부모, 아니 엄마. 그러니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단 5분만이라도, 필요하다고 하면 누군가 나타나 주기를. 엄마의 손을 잡아 주기를. 혼자가 아니라고 다독여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