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 뜻에 따라 '의사'나 '변호사'가 되겠다고 했지만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나는 누가 꿈을 물으면 주저 없이 '작가'가 되겠다고 했었다.
내가 작가가 아닌 교사가 될 준비를 대학에서 하고 교사로 근무했던 것은 '작가'라는 것이 특정한 직장을 필요로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직장에 다니는 작가들도 있지만, 모든 작가들이 작가 일을 하기 위해 직장에 다니지는 않는다. 그래서 따로 직장을 구했던 것이다.
직장을 나오고, 어찌어찌 돌아서 나는 이제 '작가'라는 말을 듣고 있다. 그리고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하나요, '작가'로 살아가기, 출판을 하려면, 책을 내기 위해서는 등등의 말을 주변에서 듣고 또 작가가 되고 싶고 책을 내고 싶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작가라는 말을 듣고 있고 책도 냈다. 전자책이 대부분이지만 종이책도 있다. (나무가 아까워서 더는 안 내주는 모양이지만) 나는 '지망생'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물론 연봉 같은 것만 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작가 같지도 않고 책을 낸 것 같지도 않다. 무엇보다 글은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데 대체 그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써도 써도 안 좋아지는 경우 여기 있어요! 라고 내가 손을 번쩍 들고 싶은 심정이다.
까닭은 내가 내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명으로 활동하는 것은 내가 19금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옷을 벗어야 한다고 비유한다. 그만큼 솔직하게 글을 쓰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예 실제로 벗은 사람들이 글에 등장한다. 벗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 후의 행위들이 더 충격적이다. 솔직하자고 치면 나처럼 솔직한 글은 없을 것이다. 너무 솔직해서 사람들은 제 본명도 밝히지 않고 댓글을 쓴다. (댓글조차도 본명으로 쓸 수가 없는 그런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더 써 달라고 사정한다. 나도 쓰고 싶지만 이게 쓰고 싶다고 나오는 글도 아니고 나도 내 안의 욕망이 주유소의 기름처럼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라 비정기적으로 쓰고 있다.
물론 19금이 아닌 글도 쓴다. 이것은 조금 더 건전한(?) 소설들이고 취향을 타기 보다는 두루두루 잘 읽히는 소설들이다. 상업성은 이런 소설들에 좀 더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느 글이건 공통점은 있다. 내 글은 인간의 내면을 파고 들면서, 자기 내면을 성찰하고 사람들을 일깨우는 그런 글이 절대 아니다. 내 글은 1차적으로는 욕망에 충실한 글이고 2차적으로는 돈에 충실한 글이다. 아침 7시에는 사람들이 정장을 입고 지하철을 타지만 새벽 3시에는 잠옷을 입거나 비닐 봉지를 입고 전철을 타는데(그렇다고 하니 실제로 한 번 타 보시라) 내 소설은 그런 새벽에 더 어울리는 소설들이다.
그렇다고 내 소설들이 B급이라거나 저질이라거나 없어져야 할 해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꼭 고상하고 건전한 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옷이라는 것은 다 찢어발긴, 19금이 아니라 29세가 되어도 어떤 사람은 읽을 수 없는 글도 있다. 돈만 밝히는 글도 있고 한없이 저급한 글도 있으며 끈적끈적한 욕망만 남아서 '이곳이 아늑한 쓰레기통이구나'(이건 좀 상투적인 말이지만)라고 생각하게 하는 글도 있다. 그리고 각자의 글은 다 존재의 이유가 있다.
한 고상한 글을 쓰는 모임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내 이름을 걸고 활동을 한다. 내 이름을 걸었으므로 나는 정장을 입은 것처럼 아마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세상이 정한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는, 상식적이고도 매너 있는. 나는 내가 작가라고 밝히지 않았다. 나는 그런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고, 실제로 잘 못 쓰니까. 그렇다고 내가 B급 소설을 잘 쓰는 것도 아니지만 그쪽에 더 익숙하긴 하다.
그건 그렇고 글을 쓸수면 는다는 글 근육은 대체 어디 붙어 있는 것인가. 혹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내장 근육 같은 것이었나. 나는 왜 쓰면 쓸수록 늘기는 커녕 땅굴만 파고 있는가. (지금도 계약한 소설 안 쓰고 왜 이런 뻘글만 쓰고 있느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