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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나비 Sep 10. 2024

아이가 폐렴에 걸렸다

아이는 지금도 자다가 기침을 한다

지난 주 목요일 밤, 아이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기침은 했었지만 밤에만 좀 심하고 낮에는 괜찮은 데다 병원에서는 비염 때문이라고 해서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약 잘 먹고 밤에 잘 자면 나을 줄 알았다. 이제껏 그래왔기도 했고. 그러나 열이 나면서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기침이 나도 '그래 열은 나지 않아' 하면서 죄책감을 참고 어린이집에 보내왔건만. 이제는 그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다음 날부터 아이는 집콕 생활을 시작했다. 얄밉게도 열은 항상 38도였다. 더 높아지지도 낮아지지도 않는. 해열제를 먹으면 조금 떨어졌다가 4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38도가 되었다. 약간 뜨끈한 정도라 아이에게는 기별도 없는 듯 아이는 잘 먹고 잘 놀았다. '원래 체온이 38도였던 거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아이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발작적인 기침은 심해졌고 특히 밤에 토할 듯이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이 이틀을 갔고 그 동안 병원에 또 갔으나 폐는 이상이 없는 것 같고 감기 몸살 같다고 했다. 폐렴 치고는 체온이 그다지 높지 않기도 했다. 아이랑 함께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는데 요리까지 하려니 죽을 맛이라 나는 우리 민족이 배달의 민족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동명의 어플을 사용해서 주구장창 배달을 시켜댔다. 마침 최근에 인세가 좀 많이 들어오기도 해서 죄책감은 덜 수 있었다. 그래, 내가 번 돈으로 먹는 거야, 뭐 이 정도 해봤자 다 합쳐도 여행비에 댈 것도 아니잖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혼자 중얼거리면서 나는 이것저것요것을 마구마구 시켜댔다. 


남편은 직장 일과 또 이런저런 일로 자주 집을 비웠고, 그러니 오롯이 집에 있는 것은 아이와 나였다. 처음에는 어린이집을 안 간다고 슬퍼하던 아이는 나와의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나 역시, 열이 언제 내릴지 모르고 남편은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니 생각보다 이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아이가 해열제를 챙기고 열을 재고 약을 먹이는 것 외에는 특별한 돌봄이 필요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 진짜로 아파서 나도 마음을 졸이며 돌봐야 했다면 스트레스는 더 높을 수 있었을 텐데, 그냥 집에 두고 같이 놀아주면서 밥 먹이고 약 먹이면 되니 조금 편하게 아이를 돌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등원을 했을 때는 만들지 못했던 특별한 추억 몇 가지를 만들었다. 하나는 '자동차 그리기'였다. 둘이 거실에 있다 심심해서 자동차를 그리기로 했다. 아이가 자동차를 그리는 것을 보다가 나도 그리겠다고 하고 그렸는데, 조금 특별하게 그리고 싶은 생각에 천장에도 바퀴를 그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 차는 뒤집어져도 달릴 수 있어." 날개도 달아 주어 언제든 날아다닐 수 있게도 했다. 다리도 달아주어서 차가 밀렸을 때 다리를 길게 늘어뜨려서 차들 사이로 성큼성큼 걷게도 했다. 아이는 나의 자동차 그림을 흥미진진하게 보더니 자신도 자동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자동차는 온 사방에 바퀴가 있었고, 유리창도 여러 개가 있었으며 어린이 놀이방까지 있었다. 우리는 그린 자동차를 벽에 붙였다. 아이는 이곳이 자동차 보관소라고 하면서, 집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는 이정표도 만들었다. 자동차 보관소와 도서관(아이의 책이 있는 책장) 그리고 안방역까지(안방이 있는 곳). 뒤이어 주방역과 변기역까지 만든 그는 열차가 와서 변기역에서 타고 주방역으로 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꾸며내며 한참을 놀았다.


두번째는, 노래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를 노래하다가 '없는 길 가려네'를 부르는데 아이가 갑자기 물었다. "없는 길을 어떻게 가?" 나는 없는 길을 가는 것은 하나의 비유이며 우리 삶을 개척하라는 뜻이라고 설명을 하는 대신, 아이에게 되물었다. "그러게, 없는 길을 어떻게 가지?" 그것은 얼마 전, 어린이집 엄마들끼리 하는 독서 모임에서 발도르프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꼭 답을 알려주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게 좋다'는 내용을 서로 공유하고 나서였다.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을 알려주는 것보다 때로는 그런 상상력을 자극시켜서 꾸며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이에게 더 좋다는 말이었다.


나는 없는 길을 어떻게 갈까, 를 묻고 나서 나 나름대로 대답을 시작했다. "일번, 비행기를 타고 간다. 이번, 다른 길로 간다." 그렇게 몇 가지를 이야기하자 아이가 갑자기 마구 생각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하게 종이와 크레용을 가지고 왔다. "다시 불러줘! 뭐라고?" 나는 아이가 이야기하는 하나하나를 적었다. "땅을 파고 간다." "줄을 연결해서 간다." "다리를 지어서 간다." 말도 안 되는 것도 있었으나 꽤 그럴듯한 대책도 많이 있었다. 아이가 쏟아낸 아이디어는 무려 스물세가지였다. 나는 그것을 종이에 다 적고 휴대폰으로 찍었다. 그날 밤, 아이는 그 종이가 어디에 있는지 자다가 찾았다. 그것이 아이에게도 무척이나 소중했던 것이었다.


며칠이 지나 열이 내렸고,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간 병원에서 뒤늦게 '폐렴' 진단을 받았다.아이의 폐 상태는 막 병이 시작되려는 때가 아니면 병이 끝나가는 때라고 했다. 그리 높지 않은 열로 아이는 병을 나름 이겨냈던 것이었다. 그날에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네 몸에서 지금 펜싱 경기를 하거든. 나쁜 균이 처음에는 이기다가, 지금은 좋은 균이 다 이겼대. 기침이 나는 것은 마지막으로 나쁜 균을 몸밖으로 물리치는 거래." 올림픽 때문에 펜싱을 좋아하게 된 아이는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왜 처음에는 나쁜 균이 이겨?" "펜싱 경기가 개인전이야 단체전이야?" 나는 되는 대로 꾸며대어 대답을 하다가 웃어버렸다. 아마도 이런 말을 하는 것도 한 때이지 싶다. 하지만 아이는 오래도록 이 때를 기억할 것 같다.


휴가 같던 며칠이 지났다. 아이는 폐렴이 거의 나았고, 아마도 며칠 후에는 다시 등원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루 온종일 나와 뒹굴던 시간들이 추억처럼 남겠지. 이상한 자동차를 그리고, 없는 길을 가는 법을 스물 세가지나 생각하고, 인형들에게 이름을 붙어서 같이 놀고, 책을 읽고, 주먹밥을 만들어 먹던 시간들(첫째날에는 그래도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배달을 시켰다.) 하나하나가 아이와 나의 뇌세포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추억들을 씹어먹으며 우리는 이후에도 여러 대화를 나눌지도 모른다. "엄마 그때 나 폐렴 걸렸을 때 왜 내 몸에서 펜싱한다고 했어? 태권도도 있는데." "엄마 내가 그 때 스물 세가지나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중에 쓸만한 건 몇 개 없었어." 아이가 주는 선물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최고는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시간은 세월이 지나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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