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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나비 Sep 26. 2024

아이의 거짓말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

추석 연휴, 갑자기 몸살이 났다.

멀쩡했던 몸이었다. 아이가 폐렴을 앓고 나서 다 나았고, 이제 좀 살만하다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몸이 늘어지면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너무 열심히 돌본 탓에 몸살이 났나 싶어 해열제를 먹고서 잤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다소 찌부둥한 상태로 눈을 뜬 나는 평소보다도 몸이 더 뜨거운 것을 감지했다. 열을 재보니 39.3도였다.

"세상에, 나 열이 39도야!"

놀라서 소리를 치는데 옆에 서 있던 아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싸. 열이 39도래."

지금 같았으면 기가 막혀 하면서 적당히 그러지 말라 이야기를 하고 넘어갔겠지만 당시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일단 생각 외로 열이 높아서 놀란 상태였다. 많이 아픈 것이 아닌가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엄마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그저 내 상태를 놀림거리로 삼은 것이 매우 화가 났다.

"열이 39도인데 아싸라고 하면 안 되지!"

나도 모르게 언성이 올라갔고, 아이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크게 화를 낼 일이 없다 보니 더 그런 듯했다.

"나, 나는 에어컨 말한 거야. 에어컨 온도가 39도라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데 남편이 한 마디 거들었다.

"에어컨 온도 말한 거였어?"

"그럴 리가 없잖아!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어!"

아이의 말을 들어주는 남편도 원망스러웠고, 같지도 않은 거짓말을 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아이도 얄미웠다. 그저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미안할 짓을 한 것도 사실이고. 엄마가 아프다는데, 열이 높다는데 그게 할 말인가. 폐렴 걸린 아이의 열을 내내 내가 쟀으니 39도가 높은 열이라는 것을 아이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뻔히 알면서, 나는 내내 저 걱정하느라 이렇게 몸도 축나고 병까지 걸렸는데 그것을 놀림거리로 삼고 나아가 에어컨 온도라는 되도 않는 변명을 하는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에어컨이라고, 나는!"

더 이상한 것은 제 주장을 굽히지 않는 아이의 태도였다. 분명 알면서 저러는 것이다. 미안하다 소리를 하기 싫어 저렇게 피해가는 것은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된다. 나는 생각하면서 마주 아이에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

아이는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기가 잘못한 주제에, 오히려 화는 자기가 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감정이 이렇게 올라가 있을 때 대화를 하면 오히려 싸움이 되는 것을 아는 까닭에 나는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열이 많이 높은 까닭에 병원도 가야 해서 더 아이와는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었다. 뒷일은 아이 아빠에게 맡기고 나는 휴일에도 진료를 하는 동네 소아과로 갔다.

추석 당일의 소아과는 미어터졌다. 두 시간을 꼬박 기다려 겨우 진료를 받았다. 그 사이 열은 다 내려 있었다. 의사는 해열제와 항생제를 처방해 주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카톡으로 남편이 아이의 사과를 받아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집에 들어오니 아이가 토라진 얼굴로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할 말 없어?"

나는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는 삐죽거리며 나를 보더니 말했다.

"미안해."

모기 만한 소리였다. 나는 안 들린다는 듯 고개를 가까이 가져갔다.

"뭐라고?"

"미안하다고."

더 말을 시키면 짜증을 낼 분위기였다. 지가 잘못한 주제에. 나는 속이 다시 부글거리는 것을 느꼈으나, 몸도 아팠고 더 실랑이를 할 에너지도 없었기에 여기에서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이 힘든 상황에서는 아싸라고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에어컨 온도 말한 건데."

아이가 또 그 에어컨을 물고 들어왔다. 나는 못 들은 척을 하고 그냥 방으로 왔다. 이러다가는 한도끝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끝난 줄 알았던 일이 다시 시작된 것은 그날 밤이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아이가 말했다.

"나는 왜 39도라고 하니까 아싸라고 말했을 까요. 1번, 에어컨 온도를 말한 거다. 2번, 그냥."

"2번, 그냥."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답했다. 그러자 아이가 말했다.

"답은 1번. 에어컨 온도를 말한 거다."

도대체 왜 이 아이는 에어컨 온도 39도에 집착하는가. 설마 진짜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우겨대니까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 알고 말한 것인데 내가 몰아치고 들어주지 않은 거라면 그건 안 되는데.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더 말을 하면 싸움이 날 것 같고 소득은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모른척하고 잤다.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어린이집 교사와의 면담 때였다. 나는 교사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가만히 나의 이야기를 듣던 교사는 금세 알겠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왜 에어컨 온도 39도를 말했는지 저는 알겠는데요."

"진짜요? 왜요? 설마 그렇게 믿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니고요. 아이가 자기 화났다고 하는 거죠. 어머님이 처음에 아싸, 라고 말했을 때 화를 내셨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아이도 기분이 나쁜 거예요. 그래서 계속 우긴 거죠. 자기 기분 알아달라고."

나는 누가 내 머리를 통, 하고 때린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나에게 아이는 가르쳐야 할 대상이었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반드시 그게 아님을 확실히 주지시켜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그래서 에어컨 온도 39도는, 나에게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것은 아이의 거짓말이고, 아이의 잘못이며, 고쳐야 할 것이니까. 하지만 같은 것을 어린이집 선생님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받아지지 않은 아이의 감정이었다. 그 말 속에 숨어 있는 아이의 눈물 섞인 욕구였다. '엄마가 갑자기 화를 내니 나도 무섭고 화가 나. 그러니 내 마음을 받아줘.' 다른 방식으로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아이는, 그렇게라도 제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기를 바랐다. '그래, 너는 에어컨을 말한 것이구나.'라고 상대가 받아들이면 상대는 그 화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아이의 마음을 풀어줄 테니까. 그것은 제 진심을 전하기 위한 아이의 전략이었다.

관계에서, 사람들과의 사귐에서 나는 자잘못을 속으로 따지는 적이 많이 있다. 까닭은 나 역시 그런 취급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저건 저래서 잘못되었어, 저건 저래서 옳지 않아. 수없이 많은 판단의 말들이 내 머릿속을 오가며 사람을 감옥에 집어 넣고 천국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으로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내 나름으로 사람을 재단하며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나 역시 판단에 의해 감옥에 가 있거나 천국에 가 있거나 한다. 나 스스로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말이, 그의 태도가 어떤 판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닌 스스로의 욕구의 표현이라면, 그리고 그 욕구에 더 가닿기 위해 노력한다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질 수 있다. 그 교사가 아이의 말을 판단하기 전에 그 욕구에 집중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타인의 욕구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필시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도 매우 관심이 많다. 그는 머릿속에서 감옥이나 천국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보고 있다. 화가 나고 기분이 좋고 불쾌하고 행복한 등등의 감정 속에서 그 마음의 욕구를 읽어주고 이해해준다. 마음 속에 화해가 일어난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화해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비록 모든 이와 화해하고 지낼 수 없을 지라도, 그 상대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온 밤, 나는 아이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엄마가 열이 39도가 된 적이 있었지."

"맞아. 그때 내가 에어컨 온도를 말했었어."

이제 에어컨 온도 39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그때 엄마가 화내서 속상했어? 화났어?"

"응, 나도 화났어. 나는 장난을 친 건데, 에어컨 온도 말한 건데, 그렇게 말하니까."

(장난을 쳤다고 하다가 아차 싶어서 다시 에어컨 온도를 끌어온 모양인데 나는 역시 그것에는 집중하지 않았다.)

"그래, 그랬었구나. 그날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그런데 엄마도 아팠는데 네가 아싸, 라고 해서 속상했어. 괜찮냐고 하고 걱정해주길 바랐었거든."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는 더는 에어컨 온도를 말하지 않았다. 이제 아이에게는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고, 그 마음에 닿으려 노력했고,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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