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산다는 것은

by 므니

제주에 산 지가 이제 7년 차다. 그동안 미취학 아이 둘은 초등학생이 되었고, 십 대의 반열에도 들어갔다. 부부로 산 지 10년이 넘어가고 40대도 제주에서 맞았다. 인생의 생애주기에서 굵직굵직한 이벤트들이 제주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이제 제주 사투리도 우리 부부보다 잘 쓰는 찐 제주도민이 되었고, 우리도 제주 바람과 습기에 익숙해져 가는 제주도민이 되었다.


"형아, 뭐 하맨? 밥 먹언? 맛 인?"

(형아, 뭐 해? 밥 먹었어? 맛있었어?")


엄마, 아빠의 고향인 부산보다 제주어를 더 잘 쓰는 아이들을 보며 재미있기도, 귀엽기도 하고 우리가 제주에 오래 살고 있구나 몸소 느낀다.



유명한 관광지를 가기보다 집 앞바다와 골목길을 산책하며 집 앞에서 일몰을 감상하고, 이름난 맛집을 가기보다 동네에서 도민들이 많이 찾는 밥집을 간다. 한치물회가 어디가 맛있는지 알고, 방어회가 어디가 맛있는 지도 알며, 갓 나온 흑돼지 족발을 구입할 수 있는 동네 정육점을 안다. 신상호텔이나 카페도 관광객들이 많이 붐비기 전에 가서 즐겨 보기도 하고, 오픈 세일을 노리기도 한다. 딱새우회가 먹고 싶을 때 동문시장에 가서 딱새우회를 1인 1 접시 하게끔 사 와서 호로록 먹기도 하고, 돼지 생갈비를 맛있게 하는 곳을 찾아 배부르게 먹기도 한다.


메모장에는 지인들이 오면 안내할 도민맛집, 로컬맛집 등을 적어두어 제주부심을 뽐내며 안내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곳 근처를 중심으로 맛집지도가 이미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어, 우리가 가던 코스대로 안내하며 우리 집 앞의 나름 유명한 일몰명소에 가서 노을을 같이 감상하는 가이드의 마인드도 가지고 있다.



제주에 살다 보니 시간, 공간의 개념이 육지에서 살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집이 제주시 동북쪽에 있어 제주 북쪽이나 남쪽, 특히 서쪽을 가기가 꺼려진다. 제주도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나뉘어 있지만, 제주사람들이 부르는 제주, 서귀포는 다른 곳을 가리키는 것임을 안다. 서귀포시 안에 모슬포도 있고, 중문도 있으며, 서귀포도 있는데 그곳은 서귀포시 안에 있지만 제주사람들이 말하는 서귀포는 따로 있다. 그래서 서귀포시에 넘어가서 모슬포로 간다. 고 말하면 제주사람들은 서귀포 가는 게 아니고 모슬포로 가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제주와 신제주는 다르며 제주에서 신제주 가는 것도 멀게 생각한다. 하물며 동북쪽 끝인 우리 집에서 애월이나 한림, 한경과 같은 서쪽으로 가는 날이면 그날은 서울에서 강원도 정도 가는 것처럼 매우 멀리 가는 장거리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산책하며 만나는 일몰을 놓칠 수 없지. 일몰 구경하는 삼부자들

매일 장엄한 경치를 집 문만 열면 보다 보니 웬만한 경치 좋은 곳에 가도 그러려니 하는 거만함이 생겼다. 제주 어디서나 잘 보이는 한라산을 보며 오늘 날씨가 얼마나 쾌청했는지, 시계가 얼마나 좋은지를 가늠해 본다. 이사오기 전 집들에서는 거실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여 매일 창문 커튼을 열며, 수평선이 잘 보이는지 확인하며 날씨를 가늠했다면 이제는 한라산이 잘 보이는지, 안 보이는 지로 날씨를 가늠한다.



제주에 산다는 것은 제주의 맑은 날과 흐린 날을 모두 사랑하는 것이다.

제주의 에메랄드 빛 바다와 환상적인 일몰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제주 해안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주의 오름들을 사랑하지만, 오름이나 중산간 속에 숨어서 숨죽여야 했던 아픈 4.3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주의 화려한 맛집을 탐방해 보기도 하지만, 숨어 있는 동네 밥집을 슬리퍼 끌고 단골손님으로 드나드는 것이기도 하다.

선크림을 아무리 치덕치덕 발라도 어느새 새까만 얼굴이 되어 버린 제주 소년인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돌아서면 습기와 곰팡이와 싸우는 제주이지만,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일몰을 보는 황홀함으로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어지러이 구불구불한 밭담을 바라보며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여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투박하지만 강인한 정취를 풍기는 밭담 속의 제주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인들이 가끔씩 직접 잡아서 주시는 생선들이 있는데, 방어를 주신 날.남편이 방어 해체를 하고 회를 떠서 먹었다.



그렇게 제주에서 오늘도 살고 있다.

비 오는 날이면 앞마당이 진흙으로 질척거려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며,

집 앞 텃밭으로 인해 초대하지 않는 벌레 손님들이 계속 집으로 들어오는 것도 기꺼이 용인해야 하며,

비가 오다 날이 개면 거미줄 세례를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제주에 살고 있다.


가끔씩 화려한 마천루와 오색찬란하게 빛나며 잠들지 않는 도시 야경이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일몰을 보며 하루 시름을 잊고, 몇 안 되는 가로등 보다 바다에서 밝게 빛나는 한치잡이 배를 조명 삼아 집으로 들어오는 저녁을 사랑하는 제주에 살고 있다.

제주에서 산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제주와 제주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그렇게 제주에서 오늘도 살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제주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