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의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여름작물을 하나둘씩 수확하며 시들어가거나 기력을 다한 식물들을 거두어들이고 밭을 갈고 재정비했다. 그래도 갈아치우지 않고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자리를 지켜 온 부추이다. 겨우내 자란 부추는 봄에는 너무 얇고 가늘어서 실파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봄을 지나며 몇 번 베어냈고 그 자리에 새로 자라나기를 반복하더니 여름 즈음에는 제법 두껍고 부추전과 부추겉절이를 쓱쓱 해서 먹어도 될 만큼의 부추로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부추가 한 여름을 지나고 가을의 느낌이 나는 아침저녁의 선선한 바람을 맞아서일까. 도시 사람이었던 내가 처음 보는 하얗고 목은 길며 올망졸망한 꽃잎을 달고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풍경에 어안이 벙벙하고 부추도 꽃을 피우는구나! 하는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며 신기해하고 바라보는 요즘이다.
부추꽃의 향기는 맡아보니 달콤한 풀내음이었다. 그리 진하지 않지만 달큼하고 은은하게 생긴 모습처럼 향기도 그러했다. 흐드러지게 피어도 꽃 얼굴이 크지 않아서 만개한 느낌이 여느 꽃보다 나지 않지만 한 송이, 두 송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목을 곧추세우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잠시 잠깐 들판에 온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 이것저것 작물을 심고 자라나는 모습에, 계절이 바뀌며 다른 옷을 입는 모습에 다시 경이감을 느끼며 살아 있는 생명이 맞음을 느낀다. 늘 붙박이로 그 자리에 있으며 움직이지 않기에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식물들인데 다채롭게 그 자리에서 여러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고 꽃을 피우니 신비롭고 신기하다.식물들 입장에서는 아등바등 쳇바퀴 돌며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가 이상하고 정신이 없진 않을까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식물이 변함없이 한결같으나 자신의 몫을 묵묵히 해내며 꽃이 피고 열매도 맺으며 변화하는 것처럼 나도 우직하게 한결같지만 변화하고 나의 자리에서 꽃도 피워 내고 열매도 맺고 싶다.
뜨거운 여름이 뒷걸음질 쳐 도망가고 있는 요즘을 잠깐 만끽하고 나면 옷깃을 세우게 되는 가을과 겨울이 금세 찾아옴을 누구나 느낀다. 가을에 거둘 것이 없이, 겨울에 비축한 것이 없이 텅 비고 황량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꽃이 핀 부추를 보면서 보는 이 없어도 묵묵히 우직하게 나에게 주어진 길을 터벅터벅 가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