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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Y Sep 29. 2021

젠장, 운칠기삼이 아니라 알고 보면 운구기일 아닌가!

- 조카딸이 올 초봄에 남편을 떠나 보냈다.

        살면서 별생각 없이 쓰는 말 중에 운(運)이라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운이 좋은 사람이라거나, 운이 나쁜 사람, 운이 있다, 운이 없다 같은 말을 무심코 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뜻한 바대로 쉽게 쉽게 풀리는 어떤 좋은 기운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싶다. 정확히 어떤 뜻으로 쓰이나 싶어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운(運)은 운명, 운수, 운세의 준말이다.' 라고 정의되어 있다. 쳇... 이게 뭔 말이래 싶다. 다시 나무위키를 찾아보니 '운(, luck)은 노력이나 열정과 같은 내부적 요소 이외에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확률이다.'로 정의하고 있어 나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조카딸이 올 초봄에 남편을 잃었다. 장례식장에서 들어보니, 조카사위가 언제부터인가 배가 계속 불편했다는데, 지난해 대구 코로나 사태로 병원 검진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코로나 사태로 조카사위의 직장이 이전보다 바빠져서 병원 검진은 더욱더 미루어지게 되었다. 뒤늦게 병원 검진을 받았는데, 청천벽력 같은 말기암 진단이 내려졌고, 진단이 내려지자마자 손쓸 틈도 없이 황망히 떠나 버렸다. 성실하게 납부해 오던 조건 좋은 암보험으로 제대로 치료 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이제 겨우 마흔을 갓 넘긴 여리 여리한 와이프와 어린 아들을 남겨 두고 억울하게 떠났다. 운이 나빠 암에 걸렸는데, 코로나로 세상이 어수선해져서 병원 방문이 꺼려졌고, 그 코로나로 직장이 바빠져서 병원 검진이 차일피일 더 미루어졌다 하니... 참 운이라는 게 무엇일까?


       오전 근무를 마치고 대구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내다보는 창 밖은,  아직은 쌀쌀하지만 곧 봄이 만개할 것 같은, 그래서 어쩐지 마음이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내달리다 결국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조카딸을 장례식장에서 만나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등을 쓰다듬어 주는데,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는 아이는 '안녕하세요' 명랑하게 인사를 해서 더욱더 억장이 무너졌다.


        큰언니의 딸인 이 조카는 참 어렵게도 컸다. 내가 철이 들고,  생각해 보니 사회성이 정말 부족했던 큰 언니가 어쩌면 가벼운 수준의 자폐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큰 언니가 어찌어찌 가정은 이루었지만,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던 데다가 부부 사이가 살얼음판 같았다. 그러다 보니 조카는 어린 시절을 이모와 외할머니 손에서 참 불쌍하게도 컸다. 이모들 도움을 받아 어렵게 공부를 마친 조카는 유치원 선생이 되었는데,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야무지게 자기 앞가림을 하며 사는 듯했다. 그러다, 나이차가 좀 나는 성실한 노총각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아들 하나를 두고  알콩 달콩 사는 것 같아 다행히다 하며 나도 조카를 잊고 살아왔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조카딸,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은 애기 엄마, 아직 젊은 내 조카딸은 넋을 놓고 있지 않았다. 집안의 이러저러한 사정, 보험금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계획 등을 전해 주며, 이상한 활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것이 더 짠하여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지가 살아갈 궁리를 하는 건가 싶어 다행이다 싶기도 하며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장례식에 다녀온 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었고,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왔다 가는 오월을 맞아 조카와 몇 번 통화를 했다. 씩씩한 날도 있었지만, 지 엄마에 대해 불평불만을 널어놓거나, 불안하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러다 전화도 뜸해졌다.  하는 일 없이 바쁘다고 했던가, 자려고 누웠다가 불현듯 불쌍한 조카 생각에 안부를 걱정하지만, 아침이 되면 또 까마득히 잊고 마는.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다.


        9월 중순, 추석에 대구에 내려갔다가 큰언니 소식을 들었다. 큰 언니가 딸 때문에 마음고생이 말이 아니라며 바짝 말랐다고 친정 엄마가 애를 끓였다. 대체로 야무지게 지 앞가림을 하며 살아오던 조카가, 불안해서 죽을 지경이다, 심장이 쿵쿵 뛴다 하며 지 엄마를 불러들여서는, 심한 말과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있다는 것이다. 병원을 가보라고 해도 말을 안 듣는다 하고, 집 앞에는 택배 물건이 쌓여가고, 아이에게는 툭하면 고함을 지른다는 것이다. 거동도 불편한 늙은 엄마가 전하는 큰언니네 소식을 듣다 보니 집안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큰언니와 그 아픈 손가락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조카딸의 불운에 기가 막힌다. 운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왜 약한 사람들에게 굳이 불운은 겹치는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누구에게 어떻게 화를 풀어야 할지 그만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의 장삼이사들의 삶에서, 살다 보면 이런저런 운 타령을 하게 된다. 소소하게는 남들 맛난 것 먹는 자리에 우연히 끼게 되어 먹을 복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자잔한 경품 같은 것에 붙기도 한다. 좀 더 크게 보면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 어떤 재능을 타고나고 어떤 직업을 갖게 되느냐, 어떤 인연을 맺느냐, 돈벌이가 어떠냐 같은 문제들에도 이런저런 운이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게 된다. 병이 들고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도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운이 끼어든다. 우리 삶의 궤적을 결정하는 이런 크고 작은 일들에 내 노력이 어쩌지 못하는 운이 끼어들어, 누구는 꽃길을 걷고 누구는 가시밭 험한 길을 울며 불며 넘어야 한다니! 결국, 운이 우연히 도와주지 않으면 한 사람이 무탈하게 평생을 산다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할 것인가?  


        옛말에 인생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그 일의 성패에 운이 칠 할이고, 사람이 노력해서 어쩔 수 있는 것은 겨우 삼 할이라는 말이다. 이 말에 따르면, 운이 좋은 사람은 칠 할의 인생사는 슬슬 풀린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운이 좋지 않은 사람은 이래 저래 노력한다 한들 칠 할의 삶이 자꾸 꼬이고 엎어진다는 의미여서, 결국 사는 것이 원래 공평하지 않다는 것인가 싶다.  '그래요? 운칠기삼이라고요? 알았습니다. 그렇다 칩시다' 한다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인생 뽑기에서 맨날 '꽝'을 뽑아 사는 것에 절절매며 휘둘려온, 칠순이 코 앞인 큰 언니의 삶에는 왜 불운이 끝없이 줄줄이 이어지는 것일까? 큰 언니의 삶에 이제는 운이 좀 따라 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왜 큰 언니의 아픈 손가락인 조카딸에게마저 대를 이어 불운은 계속되는가 말이다! 젠장, 운칠기삼이 아니라 알고 보면 운구기일(運九技一)이 아닌가 말이다.


        개인의 삶에서 운은 왜 공평하지 않은가?  무릇 사람 간의 거래에도 상도덕이 있는데, 이 세상을 주관하는 우주의 기운에도 운 도덕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인생을 길게 보면 '운 총량의 법칙' 같은 것이 있어서, 불운이 줄줄이 이어지다가도 어느 시점이 되면 불운 대신에 행운이 찾아와서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아야 하지 않은가 말이다. 아니면, 인간 생의 시간 축으로는 도저히 그 균형을 맞추기 어려워, 더 긴 시간 축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일테면 불운한 이번 생을 어떻게든 수용하고 견디어 내면 다음 생이 주어지고, 그다음 생에서는 운이 따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믿어야 할까?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한번 사는 인생사에서, 평균적인 운의 공평함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해서는 안 되는, 복불복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의 운도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있다. 일테면 주변에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그 좋은 에너지가 다시 좋은 에너지를 불러들여 마침내 운을 바꿀 수도 있다는 뉘앙스의 이야기이다. 간혹 인간극장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보잘것없어 보이는 고통스러운 삶일지라도 그들이 죽을힘을 다해 버티는 그 삶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고, 인간적인 따뜻함을 실천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일상을 엮어 가는 삶. 그러다 보면 객관적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나, 스스로가 있는 그 자리에 결국 사랑과 긍정을 만들어 내는 삶도 있다.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무수히 넘어지고 쓰러지며, 불운을 견디는 내면의 힘을 키웠을까!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갑작스러운 불운 앞에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조카와 큰 언니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그런 상황을 겪고 있다면 나는 어떠했을까? 십중팔구 절망하고 무너져서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엎드려서 세상을 원망하며 자포자기했을 것이다. 조카도 절망하여 세상을, 부모를 원망하고 있는 중일 게다. 솔직히, 당장의 나는  '운칠 기삼'이라는 말에 주먹을 날려 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운이 겹칠 때,  너무 전전긍긍하며 속 끓이지 말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불운이 겹칠 때 '아! 운칠기삼이라잖아. 원래 잘 안 풀릴 일이었어.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 다음에는 좋은 일도 생기겠지..' 하며, 남겨진 삼 할의 노력과 언젠가 찾아올 운에 기대하게도 만든다.


        나는 믿는다. 가여운 우리 조카가 지금은 비록 망연자실하여 어둠 속에 울부짖고 있지만, 결국 불운을 딛고 일어나 고통의 동굴에서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불운이 연속으로 귓방맹이를 후려칠 때 무릎 꿇고 자포자기하겠지만, 우리 조카는 결국 일어나 다시 제 운명의 길을 담담히 걸을 것이다. 그러니, 우주를 주관하는 신이 있다면 우리 가여운 조카, 좀 봐주시기를… 어둠 속에 누워 내가 스쳐온 장소들과 사람들을 떠올리며 간절한 마음이 되는 요즘이다.


    '콩아...

     엄마가 요즘 마음이 많이 아프구나...

     왜 세상은 이런걸까...'



                                                                        사진출처: https://unsplash.com/s/photos/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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