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영화 #1) Cosmic Voyage

- 가을이 깊어 가는 워싱톤 DC에서 만난 광대한 우주 이야기

by 나무Y

일전에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영화 '듄'을 보고 돌아 오는 길에 딸 아이가 기억에 남는 영화가 무어냐고 물었었다.


나의 영화 취향이라... 무어라 명쾌하게 정리해서 말하기가 어려웠다. 어디 영화뿐이랴... 책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살짝 흐리멍텅한 것 같다.(이런... 그나마 음식 취향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평범한 누군가에 대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규정하는 것은 아마도 그 사람의 소소한 취향 그 자체가 아닐까 한다. 누군가의 일상 속 - 먹고, 보고, 즐기고, 돈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하는- 그 시간들 속에 드러나는 미묘한 선호, 그 작은 것들이 그 사람 자체이며, 그렇기에 누군가를 존중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그 사소한 취향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나는 아직도 내가 무엇을 무지 좋아하고, 또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은 듯 하여, 여전히 나의 취향을 알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이 나이 되도록 무얼한 것인지... (열심히 일만 했다고?)


각설하고, 나의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몇개의 기억을 꺼내어 보자.




#1. Cosmic Voyage (우주의 역사)


90년대 후반, 무슨 일인가로 워싱톤 DC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아마 11월 경이었을 것이다. 가을이 깊을대로 깊어진 워싱톤은 춥고 쓸쓸한 인상이었는데, 거리에는 플라타너스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아마도 'Next Generation Networks' 라는 미래 전망 심포지엄이었을 것이다. 몇일간의 심포지엄이 끝나고, 같이 간 일행과 미국 항공우주박물관 구경을 나섰다. 거기서 'Cosmic Voyage' 라는 과학 다큐멘터리 영화를 우연히 관람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가물 가물하다. 게다가 자막없는 과학 다큐멘터리였으니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돔 영화관이라 거의 누워서 영화를 봤었다는 것, 천장 한 가득 펼쳐지던 광대한 우주, 영화를 보다가 난데없이 눈물을 쏟았다는 것, 그 와중에 같이 간 Y는 가늘게 코를 골며 잤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스미소니언연구소가 제작했던 'Cosmic Voyage'는 유럽 어느 소도시(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안나는) 광장에서 놀고 있는 소녀의 굴렁쇠에 앵글을 맞추며 시작된다. 소녀의 굴렁쇠는 서서히 확장되어 마을과 도시, 전 세계로 순식간에 시야가 확장되고, 더 나아가 지구를 떠나 창공을 지나 태양계를 품고... 우주로 확장되며 그 시간의 역사를 이야기해 준것 같다. 그리고 굴렁쇠는 다시 서서히 줄어들어, 우주에서 태양계로, 지구로, 대륙으로, 도시로 소녀의 마을로, 소녀가 노는 작은 광장을 지나 ... 종래에는 아주 작은 세포 속 마이크로 세상 이야기로 줌인하며, 나를 이끌었다.


천장 한 가득 펼쳐지던 광대한 우주에 압도된 나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눈물이 쏟아져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그에 비해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하찮은 작은 세상에 찰나의 순간을 머무는지... 그 찰나의 순간을 머물며 용은 또 얼마나 쓰는지... 아마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과학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난데없이 눈물을 쏟다니, 참 당황스러웠다. 돔 영화관을 나서며, 일행이 눈물자국을 눈치챌까봐 꽤나 신경이 쓰였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과 가끔씩 인생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 'Cosmic Voyage'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Cosmic Voyage' 가 그렇게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였을까?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지구 위의 작은 소녀로 부터 조금씩 멀어지다, 지구를 떠나고 광대한 우주를 품던 그 둥근 원, 그리고, 광대한 우주에서 출발하여, 작은 소녀로 줌인해 들어가던 장면들의 기억은 생생하다.


딸 아이와 '듄' 영화를 보고 온 몇일 후에 별 생각없이 'Cosmic Voyage'를 검색해 봤다. 허걱 ! 다큐멘터리 채널에 떡 하니 올라와 있는게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클릭을 했다가 화들짝 놀라 얼른 빠져 나왔다.


모건 프리먼의 듣기 좋은 나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되자 마자 불현듯 깨달았다. 나의 'Cosmic Voyage'는, 플라터너스 낙엽이 가득 쌓인 늦가을의 워싱톤 DC, 돔형 천장에 가득 펼쳐지던 밤하늘, 난데없이 쏟아지던 눈물, 이제는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친구 Y와의 추억으로 남아, 나의 30대 시절 기억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을. 비록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모호하여 내가 나의 취향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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