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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영 Apr 21. 2024

13화 누에의 일생


  봄, 개나리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날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고갯길을 넘어갔다. 산, 속에 숨어 있는 밭에서 뽕잎을 따고 집으로 내려오던 희자는 교복치마의 남색 끝 단을 보았다. 고개를 팩 돌리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교복에 시선을 오래 둘 수가 없었다. 집안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외수가 줄줄이 여자 동생을 낳은 것이 화근이었다. 할머니는 몸 풀 시간도 주지 않고 부엌으로 엄마를 몰아넣었다.

  얼마 전 4번째 여동생이 태어났다. 산파할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휙 돌아서던 아버지가 아직도 눈앞을 가렸다. 그리 차갑던 아버지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환영받지 못하고 태어나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것인지 그날 희자는 알았다.

 침울하게 돌아서던 창근의 뒷모습은 희자가 평생을 살면서 가슴 한편에 새겨두게 만들었다.

  외수가 여자아이를 낳은 건 총 7명이었다. 희자 아래로 둘째를 잃어버리고, 다섯째를 잃어버렸다. 5명의 여자 아이만 살아남았다. 희자가 기억하는 다섯째 여동생은 저 너머 산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 있었다. 정식으로 무덤을 쓸 수 조차 없는 아기들이었다. 돌을 쌓아서 만든 가 무덤에 아이를 묻었다.

  찾는 이 없는 골짜기 구석 어딘가에 묻고 돌아서면서 외수는 희자의 손을 꼭 잡았다. 동생이 사라졌다는 것은 알았기에 말없이 따라나섰던 그 길에서 희자는 울음 한번 없었다.

  그쯤 많은 아기들이 무덤도 없이 골짜기 어딘가로 흘러 들어갔다. 정식으로 장례조차 치를 수 없었던 어린 영혼들은 그곳에서 잠들었다. 어쩌면 그 영혼들이 비가 오는 날 울고 있을지 모른다. 울음조차 흘릴 기회를 뺏긴 자그마한 것들이 구름 낀 하늘을 핑계 삼아 뚝뚝 흘리는 눈물이 비일지도 몰랐다.

  할머니의 아들 타령은 막내여동생이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나고부터 더 심해졌다.

  '집안 잡아먹을 것. 남들 다 낳은 사내 한 명 못 낳고... 쯧.'
  '너머 집 대 끊어 놓을 일 있나? 으이고, 아무 짜게도 씰데없는 것.'
  '고추 달린 거 하나 낳지도 못하는.....'
  
  빨래를 너는, 밥을 짓는, 소죽을 끓이는, 고모들의 숙제를 봐주는 엄마의 뒤에서 할머니는 그리 말했다. 돌덩이를 엄마의 가슴팍에 던지고 돌아서는 것이 할머니의 일과였다. 희자가 보기에는 아무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아들이라는 거.

  아버지만 봐도 그랬다. 몇 년은 면사무소에서 근무를 했지만, 벌어오는 시원찮았다. 늘 허덕이는 것은 자신이었고 여동생이었다. 삼촌들, 고모들의 공부는 엄마의 몫이었다. 동생과 자신의 옷은 사 입히지 않아도 철철이 시누이와 시동생의 옷은 챙겼던 엄마였다.

  학교를 그만두게 한 엄마보다 어느 날은 고모가 더 미웠다. 같은 여자이면서 고모들은 배워도 괜찮고 자신은 배우면 안 된다는 할머니의 논리도 이해되지 않았다. 할머니도 여자이면서, 여자는 죄라고 말했다.

  시어머니의 반대로 학교를 가지 못하게 했다는 거 머리가 크면서 희자도 알았다. 불뚝, 이유 모르게 화가 날 때는 고모들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물론 엄마에게 들켜 더 두들겨 맞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작은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 길을 희자는 몰랐다.  

  '여자' 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건 희자에게만 한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도, 친구들과 놀러도, 책을 읽는 것도 모두 허락받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계절마다 물어오는 바람이 코를 시큰거리게 할 때마다 참아야 했다. 엄마가 11명의 식구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을 홀로 짊어지게 할 수 없었다. 그러니 희자 자신은 엄마에게 도움이 되어야 했다. 그게 여자의 삶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서글퍼 울고 싶기도 했다.

  그런 날은 스스로를 달래야 했다. 지금은 지나가는 날들 중 하나이니 괴로움 같은 건 참으면 되는 것이다. 이리 스스로를 달랬다.
  
  자꾸만 태어나는 여동생들의 울음소리도, '고추 밭에 터 팔아라.'라며 막내여동생을 안고 할머니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통증이 일었다. 알 수 없는 답답증에 사당나무 아래서 머물다 오기를 반복했다.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알록달록 리본을 보며 아스팔트 위를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따라오는 이 흙 길이 아니라 내딛는 발소리마저 경쾌한 곳을 달려보고 싶었다.

  저처럼 휘날리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펄럭이며 답답증은 없어질 텐데.

 희자는 알지 못했다. 아스팔트가 좋아 버린 이 흙먼지 길을 결국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희자의 요즘 일상은 누에들을 돌보는 것이다.

  요놈들은 참 기특하다. 먹은 게 있으면 꼭 토해내는 게 있다. 그것도 비싼 실을 토해 내니 아니 귀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꼬물꼬물 기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면 마음이 그처럼 여유로워졌다. 암만 기어가 봐도 제자리인 것이 안타까워 기어가게 두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유를 주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 다시 돌아왔다 다시 기어갔다.
  
  누에는 곤충이다. 손가락 마디만 한 누에가 번데기가 될 때 몸을 보호하기 위해 실을 토해 낸다. 이 실이 명주실의 원천이 된다.

  누에는 육안으로는 암수가 같게 생겼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알 수 있다. 암컷은 뒤집으면 두 개의 점이 박혀있다. 알에서 깨어나서 4번의 잠을 자고 20여 일을 자란다. 약 3일 동안 몇 그램의 고치를 완성한다.

  세상은 무한히 넓다고 하나, 누에에게 세상은 네모난 나무 상자 안이다.

  짧은 불꽃같은 삶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들은 한 번도 세상 밖을 나가지 못한다. 혹 주인 몰래 나가더라도 운이 좋으면 외수의 손에 붙잡혀 다시 돌아온다. 운이 나쁘면 밟혀 죽거나, 닭의 모이가 되고 만다.

  한 달 간이라는 짧은 생을 사각의 틀 안에서 보내가 가는 누에들이 안타까워 희자는 부러 꺼내 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서슬 퍼런 수탉의 먹이가 되는 것을 보고 다시는 누에들을 꺼내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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