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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영 Mar 31. 2024

10화 봄은 그냥 오지 않았다.



산에 둘러싸여 있는 밭의 땅이 해가 들이 비치자 녹기 시작했다. 살얼음 걸쳐있던 땅에서 찌드덕- 찌드덕- 얇은 얼음이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봄이 오기 위한 아픔처럼 보였다. 따뜻한 봄은, 그냥 맞이하는 것이 아니었다. 얼었다 깨어졌다 또 얼었다를 무한 반복한 후에야 만날 수 있는 것이 봄이었다. 지금 마늘이 심어져 있는 이 밭 또한 그 무한 반복된 아픔을 함께하고 있는 중이었다.

푸드덕-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고요한 산을 깨우고 날아올랐다. 출렁이며 소나무 숲의 솔잎들이 일제히 머리를 뻗쳤다가 앉았다. 순간 깨어지진 정적에 위수가 눈을 돌려 새가 날아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좀 전의 출렁임이 거짓말같이 다시 정적이 돌았다. 숲은 그렇게 시시때때로 얼굴을 달리 하였다.

마늘 밭에 쪼그리고 앉아,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새싹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움찔움찔 푸른 싹을 틔우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벌써 잎 끝이 말라 앙상했다. 모진 삶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마늘이 땅에 묻히는 그 순간부터 모진 삶은 시작되었는지도 몰랐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위수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하여 무한 순환하는 삶이 꼭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때로는 자신을 깎아내리는 모진 시간을 견디어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마늘이 그랬다. 가을 풍성함을 가득 담고 땅속으로 몸을 숨기는 시작에는 인내라는 긴 기다림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풍성함을 주기 위해 자신은 언 땅에서 숨을 죽여야 하는 운명의 마늘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 위수였다.

톡톡-
흙을 틀어 주던 위수가 손길을 멈추게 한 것은 들깨 대를 치우고 있던 창근의 외마디 비명이었다.  

"윽"
놀란 위수가 고개를 들어 창근을 확인했다. 들깨 대를 치우던 창근이 그늘진 곳에 아직 녹지 못하고 있던 얼음에 발이 미끄러진 것이었다.

"자빠지지 않았어요?"
걱정스레 올려다보며 물었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은 것 같아 보였지만 발목을 접질린 것인지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는 것이 보였다.

하던 일을 멈추고 창근에게 다가가 그의 발목을 살펴보았다.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으나, 속이 상했을지 몰라 그의 발목으로 자연스레 손이 갔다. 바짓단을 올려 그의 발목을 손으로 눌러보았다.

"혹시 아리지 않어요? 아리면 병원을 가야 할 것인디.."
"병원 갈 정도 아니여. 수선 떨지 말어. 잠시 미끌한 걸로."
"앉어 봐요. 좀 보게."
"되었데도 뭔 수선이여."

말로는 되었다 하면서도 창근은 마른땅 위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위수는 본격적으로 발목을 살폈다. 시큰한 것은 아닌지, 아픈진 않은 지 물어 보며 발목이 붓지는 않는지 살펴보았다.

창근은 위수가 묻는 말에 답하지 않으며 위수의 작은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원체 작은 것은 알았지만, 이리 작았던가. 저 몸으로 뭘 한다고 쯧...

가을 땡볕에 마늘을 심으러 뛰어다녔을 위수가 눈에 선했다.


***

해가 지기 전 서둘러 고갯길을 넘어왔다. 산에 싸여 있는 밭은 빨리 밤이 찾아온다.

밤이 되면 노루가 내려와 땅을 헤집을 것이고, 멧돼지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내려올 터였다. 겨울은 땅이 얼어 곡식을 키울 수 없는 인간에게도 까슬까슬한 계절이지만, 산을 터 삼아 살아가는 동물들에게는 더 버티기 힘든 계절이었다. 앞으로 새싹이 돋아나는 3월 4월, 열매를 맺는 5월까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산을 내려왔다 가는 일이 허다할 터였다.

산을 고향 삼아 사는 동물 중 그래도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이가 있는데, 이는 다람쥐였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볼때기를 도토리로 가득 채웠고, 창고도 꽉꽉 채웠을 터였다. 그렇게 모은 열매로 나무구멍에 자리 잡고 겨울잠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조금 더 날이 풀리면, 잠에서 깨어 온 산을 제집 마냥 돌아다닐 터였다.

위수는 다람쥐의 겨울을 생각하며, 아직 풀리지 않은 날 으스스함에 어깨를 마주 잡아 떨림을 잠재웠다.

다행히 창근의 발목에서 큰 이상이 없었다. 내리막길 고갯길을 오면서도 괜찮았고, 흙 길로 들어서면서 다시 살핀 발목은 붓지 않았었다.

어둠이 슬금슬금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이미 해가 넘어갔고, 성급한 달이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위수의 걸음 또한 빨라졌다. 저녁을 챙겨야 하기에 작은 발로 걸음을 빨리 했다.

뒤에서 느긋하게 마지막 겨울 논을 구경하며 따르던 창근이 위수를 불러 세운 것은 작은 발의 성급함을 본 후였다.

"무에, 그리 급혀? 그러다 자빠지면 누굴 고생시키려고?"
"......................"

뜬금없는 창근의 말에 위수가 걸음을 멈추고 고갤 돌렸다.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리 서두르다 다친다고, 아직 해도 남았는데 천천히 걸어. 어찌 남편 두고 혼자 그리 급혀. 급하긴.."
"저녁상을 봐야 하는디 늦었어예. 시장하실 낀데.... 애기씨도 그렇고.."

창근은 우물쭈물 빠른 걸음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위수를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너에게는 내가 우선이지 않느냐? 밥이야 조금 늦으면 어때?  
창근은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는데. 위수는 밥이, 막내가 먼저라 이야기했다.

창근의 말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위수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잡은 팔은 얇아 꼭 불쏘시개로 쓰는 나무 막대기를 잡은 것과 같이 가늘었다. 잡은 것은 손목인데 시큰한 것은 창근의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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