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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영 Mar 17. 2024

8화 겨울 방학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부엌문을 열고 나갔지만, 그 앞에서 더는 발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순서가 되려면 아직 한참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생들을 먼저 찾고, 부모님을 찾은 후 저녁상을 물린 후에나 '별 탈 없었냐?' 그 질문을 하나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수의 생각대로 그는 제일 먼저 막내여동생을 안았고, 차례로 도련님들을 안부를 묻었다. 양철 대문 앞에서 첫째 도련님의 머리를 헝클고 있는 그의 손이 보였다. 그의 큰 손을 위수는 돌담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겨울 내내 차가운 바람을 맞지도 않았는지 그의 손은 희고 고왔다. 투명을 살을 뚫고 보라색 핏줄이 불뚝 튀어나와 마치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물 마를 날이 없는 위수의 손은 까칠했다.

아팠나. 아팠을 지도 몰러. 시험을 쳐야 했으니, 고단도 혔겠지. 식사를 제때 챙기지도 못했을 터니.
시린 바람에 더 부각되어 보이는 핏줄을 보고 위수 혼자 결론을 내렸다. 기말고사를 봐야 했으니, 바빴을 터였고,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했으니 터이니 힘들었을 거라 여겼다.

창근은 조금 전부터 자신의 손에서 시선을 쉬이 손을 거두지 못하는 위수 보았다. 조금 마른 것도 같았다. 가뜩이나 작은 키가 더 작아진 듯 서있는 것이 가능이나 한지 바람이 불면 부는 방향으로 몸을 틀 것 같이 말라 있는 위수가 작아 보였다.

위수는 창근의 손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가 다가오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터벅터벅 거리를 좁히고 있는 사이 위수는 까슬거린 손이 부끄러워 도망칠 곳을 찾았지만 뒤로는 부엌이 앞에는 창근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끝만 원망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는 자신을 먼저 봐주지 않은 그에게 서운함에 미움을 보냈으면서 정작 그가 다가오니 피할 생각부터 하는 위수였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부끄러움인가. 볼이 붉어지는 듯했다. 부부로 연을 맺은 늦여름, 가을이 지났고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지만 창근의 얼굴을 본 적보다 보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차로 두 시간은 걸리는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기에 주말에만 찾았고, 그 조차 찾지 않는 날이 더러 있었다. 오랜만에 본 그가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바람을 몰고 왔다.

주춤 뒤로 걸음을 물리는 위수를 보았는지 창근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리... 말랐노? 밥을 제때 먹기나 하는 건지 모르겠네."  
"잘 먹고 있지예. 잘 챙겨 주십니더."

혹 구박받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할까 지레 시부모님이 잘 챙겨 준다는 쓸데없는 말을 붙였다. 그는 궁금해하지도 않을 이야기일 텐데.  

"고생 많다. 혼자 살림 챙기느라."
그 말 끝에 위수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놓고는 창근은 마루로 올라섰다.

고생 많다.
주말에 찾아도 늘 말없이 밥 먹고 글을 읽고, 동생들의 공부를 봐주는 것이 다였던 그에게 처음으로 따스한 말을 들었다. 지금 막 김을 내뱉은 가마솥의 하얀 김처럼 따뜻했다.

무심한 사람이라 여겼다. 늘 앞에 서면 주눅이 들었다.

창근이 무감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면 절로 움츠러들었던 위수였다. 그것이 자신은 중학교만 나왔고 그가 고등학교를 또 대학을 갈 사람이기 때문에, 그보다 배우지 못한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움을 택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으나,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창근이 부모님께 절을 올리고 앉아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부쩍 살이 빠진 것이 눈에 보였다. 움푹 파인 볼 살에 광대뼈가 두드려져 보였다. 시들어 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날지 못하는 새처럼 보였다. 날개는 있으나 날지 못하는, 날고 싶으나 부러진 날개에 날지 못하는 새. 창근의 눈에 비친 아버지가 그리 보였다.

건강하던 아버지가 그리 된 것은 사고였다. 시골길 차보다는 달구지가 더 많은 곳에서 차를 만난 것은 운이 좋지 않아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그것을 피하지 못한 것은 차가 빨랐기 때문이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비포장 시골길을 빠르게 달릴 만큼 급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운이 나빴던 것이 이유라고 사람들은 그리 말했다.

하루하루 작아져 가는 아버지를 보면 창근은 사고가 났던 날을 떠올렸다. 무엇이 운이 나빴던 것인지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상념에서 자신을 끄집어낸 것은 위수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밖에 있느냐? 네 서방 좋아하는 삭힌 감 좀 꺼내 오니라."
"....... 예.... 에."
무엇을 하던 인지 한 템포 느리게 위수가 답했다.

삭힌 감을 준비하라는 말을 듣기도 전에 사실 위수는 장독대에서 감을 꺼내왔다. 그가 좋아한다는 것을 지난가을 알게 된 후 감 삭히는 것에 깨나 열중하기도 했다.


지난가을, 주말을 맞아 내려왔던 창근과 고개 넘어 밭을 함께 갔다. 높이 있는 감을 따야 했는데 키 작은 위수가 장대를 이용한다 하여도 어려울 것이기에 창근에게 부탁했었다. 아침나절부터 책을 읽고 있던 그에게 조심스레 '감 좀 따러 가야 하는디...' 말끝을 흐렸다. 책에서 눈을 돌려 위수의 얼굴을 보고는 말없이 일어 서던 그였다.

작은 고개를 넘어 산속에 파묻혀 있어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지 못하는 곳에 있는 밭에 도착할 때까지 창근은 말이 없었다. 다만, 앞서 가며 가을 도깨비 풀을 막대기로 탁탁 쳐주어 위수의 옷에 도깨비 풀이 묻는 것을 막아 주었다.

산속에 파묻혀 있는 밭에는 주황색 열매가 뿜어내는 광택으로 빛나고 있었다.

손에 닿는 나뭇가지에 있는 감은 딸 요량으로 감나무 밑을 총총거리며 오가는 위수를 참다못해 창근이 버럭 했다. 위험하니 떨어져 있으라 창근이 밭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렀는데도 감나무 밑을 떠나지 않는 위수를 보다 못해 말했다.

'좀. 떨어져 있으래도 말을 참 안 듣네. 맞으면 우짤라고 알짱거려.'
창근의 말소리는 투박했지만 눈은 걱정을 담고 있었다.

한소리 들었지만, 감을 따며 떨어지는 감에 혹여 자신이 다칠까 버럭 소리 지르던 그가 싫지 않았다. 위험하니 떨어져 있으라 창근이 밭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렀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봄바람도 아닌데, 살랑살랑 새싹을 간지럽게 하는 봄바람처럼 위수의 심장도 간지러웠다


단감이 맛이 들려면 아직 더 가을 해를 맞아야 했고, 대봉이 홍시가 되도록 하려면 첫서리가 내리는 11월까지 두어 단단해져야 했다.

대봉감은 끝이 뾰족하고 길쭉하게 생긴 큰 감이다. 단단할 때는 떫은맛이 심해 먹기가 힘들지만, 완전히 익어 말랑한 홍시 상태가 되면 당도가 높아 긴 겨울밤 유용한 간식이 되곤 한다. 하지만 삭힌 감을 만들려면 대봉 감은 좋은 재료가 되지 못한다.

떫은 땡 감이 삭힌 감을 만들기에는 좋은 재료이다. 납작한 감이거나, 대봉 감 모양처럼 세로로는 길지만 작고 둥근 둥시감으로 삭힌 감을 만들 수 있다. 아직 가을이 완연해지지 않은 10월쯤 삭힌 감을 만들 둥시감을 따 삭힌다. 누렇게 익어 단 맛을 낼 것 같은 감이지만 한 입 베어 물면 떫은맛에 인상을 쓰고야 만다.

삭힌 감을 만드는 방법은 소주를 이용하거나 소금물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위수는 시어머니가 일러준 소금물로 감을 삭힐 예정이었다. 감을 따 끓인 물에 굵은소금을 넣고 녹여 감꼭지가 위로 오도록 하여 장독대에 넣어 감을 삭힌다. 이때 중요한 것은 꼭 소금물을 감의 꼭지까지 다 잠겨야 한다. 그래야 떫은맛이 사라지고 달착지근해서 찬 바람 부는 겨울 제격이다.

그렇게 창근과 함께 따온 감으로 위수가 가을 내, 겨울까지 장독대에 두고 익히고 있었다. 창근의 겨울밤 심심하지 않게 입 안을 즐겁게 해 줄 감이라 생각하니 장독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살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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