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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영 Mar 24. 2024

9화 봄은 시작된다고....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 입춘(立春)이 들며, 봄이 시작되고 있음을 이십사절기의 하나가 알려왔다. 겨우내 얼어 있던 땅도 풀리기 시작하는 날이 왔다. 계절은 시간 따라 흘러 변화를 움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내린 눈을 다 녹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낮 동안 지면에 내려앉았다 떠나는 해는 한결 포근해졌다.

감기에 잘 걸리던 막내 기씨는 겨울 내 위수의 방에서 지루한 놀이를 했다. 놀이라야 옷을 깁는 위수의 옆에서 천 쪼가리를 가지고 바닥을 닦고 다니는 것이 다였다. 위수가 보기에는 지루했지만, 애기씨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적막만이 감도는 방에 시원한 바람이 되어 환기를 시켜주는 듯한 그 웃음이 좋아 위수도 따라 웃곤 했다. 위수를 웃게 하는 작은 행복이었다.

시어머니보다 위수와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있었고, 더 따랐기에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작은 실수에 만나는 시어머니의 매서운 눈초리에 움찔 쪼그라드는 자신을 잠시나마 웃게 해주는 것은 두 살 막내 애기씨였다. 위수의 얼어버린 마음을 녹여주는 것은 늘 막내 애기씨였다.

그런데 창근이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오고 난 후로는 애기씨를 데리고 자는 일이 없어졌다. 창근이 반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애기씨와 함께 방을 쓰면 공부에 방해를 받는다고 했다. 위수의 작은 머리로는 그것이 무에 그리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해, 창근을 말리려 하다가 괜히 한소리 들었다.

"애기씨가 저랑 자는 게 익숙해져서, 떨어지면 불편할 터인디... 조심할텐께 같이 있으면...."
까지 말했다가 날아온 창근의 꾸지람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불편하다는데 무에 그리 말이 많노. 글 읽는데 어린것이 꼼지락 거리면 어찌 글이 머리에 들어와."

그 말끝에 무어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창근의 꾸지람 같은 눈빛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이른 새벽부터 쏴-아 물 떨어지는 소리가 한 바탕 소란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막내가 또 장난질을 하는지 들려오는 위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애기씨, 그럼 못써. 이리 와보라카이."
"시른디."

언제 싫다는 말을 배운 것인지 곧잘 막내는 뭔가 말을 하면 '시른디'를 읊었다.

막내가 아침부터 물을 한 바가지 쏟은 바람에 위수의 치맛자락이 물로 젖어버렸다. 말리려는 위수의 손을 쳐내고 바가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쏟아 버렸다.  

창근은 창호지 밖으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앉아 잠시,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집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위수가 막내를 특히 챙긴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내가 자신의 방에서 자고 먹는 것을 보고 놀란 창근이 었다. 창근이 한 달간 머물다 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위수는 막내를 어머니 방에 보낼 생각이 없는지 잠자리에 데리고 왔었다.

내 없었을 때는 그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남편이 옆에 있는데도 어린 시누이를 곁에 두고 자겠다는 생각을 어디서 나온 것인지... 조그마한 머리통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늘 궁금했는데 남편 놀리는 데에 다 쓰고 있나 보다 했다.
창근은 무심한 위수에 서운함을 느꼈다. 공부에 방해가 되니 어머니 방으로 보내라는 에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제 눈치를 살피면 뜸을 들이는 것을 알았지만 매서운 눈초리를 주고 돌아서 앉아 버렸다.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남편이 자신보다 더 동생을 아끼는 것 같은 위수의 행동 때문이었다. 남편도 없는 집에서 자신보다 더 식구들을 챙기는 모습에 한편에는 위수에 대한 고마움이 들어있었지만, 서운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위수와는 학업으로 떨어져 있던 시간이 많다 보니, 정을 붙일 시간이 없었다. 늦여름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하나, 겨울까지 몇 개월 동안 살을 붙이고 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창근은 그것이 마음에 걸려 이번 방학은 위수와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낼 요량이었다. 저만 보면 부끄러워하는 그 못난 버릇도 고쳐야겠다 생각한 창근이 었다.


아침상을 치우고 방으로 들어온 위수가 홀로 부스럭거렸다. 무얼 하나 창근이 보니 두꺼운 옷을 꺼내 입고, 몸빼를 받쳐 입는 것을 보니 밭에 갈 요량인 듯했다.

"어딜 가려고 그라노?"
"골짜기 밭에, 마늘 심은 거 보고 올라고요. 10월에 심었는데 며칠째 못 가봐서"

위수는 왜 묻냐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생각했다. 책을 보는 것이 다였지 저에 대해 뭔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기에 의아한 듯 창근을 보았다.
더 의아한 것은 창근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두꺼운 점퍼를 꺼내 입기 시작했다.

"어디..... 갈라꼬요?"
"밭에 간다면서 같이 갈라꼬."
"댈낀데.... 집에 있으시지...."

말리는 위수를 한번 보고는 창근을 마저 옷을 입었다. 입춘이 지났다고 하나 아직 얼어있는 땅은 추울 것이었다. 더욱이 골짜기 밭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 그늘이 져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추운 곳에 혼자 보내는 것보다 같이 가는 것이 맘이 놓였다.

더욱이 시집온 날보다 살이 더 빠졌지 찌지는 않은 위수였다. 얇은 손목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걱정되어 창근은 홀로 보낼 수가 없었다.

마늘은 골짜기 밭에 작년 10월 심어 두었다.

수확한 풋마늘을 가을 내 잘 말린 후, 등이 활처럼 굽고 붉은 갈색 비늘로 감싸있는 마늘을 심었다. 붉은 갈색의 비늘 잎은 새싹의 보호하고 있었다. 마치 어미가 어린 자식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겹겹이 싸여 보호하고 있는 것을 벗기어 내면 흰 육질이 나왔다.

늦가을, 겨울이 깊어지면 푸릇푸릇한 싹이 나기 시작했다. 잎은 곱게 나는 것이 아니라 어긋나고 긴 피침형으로 끝이 말리어 자랐다. 봄이 만연하면 피침형 가운데에서 긴 줄기기 뻗어 나오기 시작하는데 흔히들 사람들은 이것을 마늘종이라고 불렀다.

마늘종은 봄에 좋은 반찬이 되기도 한다. 기름에 살짝만 볶아도 연한 육질에서 즙이 톡톡 튀어나와 입맛 돌게 하고 간장에 삭혀 장아찌를 만들어 두면 계절이 여러 번이 바뀌어도 좋은 반찬이 되었다. 입맛이 없을 때 물에 말아서 마늘종 장아찌 하나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었다. 새콤한 것이 먹고 싶다면 마늘 이파리와 마늘종을 초고추장에 버무려 먹어도 맛 좋은 반찬이 되었다.

그렇게 보면 마늘은 버릴 것이 없었다. 마늘도 마늘종도 잎도 좋은 반찬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땅에서 나서 다시 땅으로 돌아가 자신을 키워내고 잎도 줄기도 누군가의 영양분이 되어 자신을 끝맺는 이가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면 마늘만큼 모든 것을 주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 싹 틔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무한 순환하는 삶을 사는 것이 없었다.

위수는 마늘밭에 서 잠시 마늘의 순환하는 삶을 생각했다.

인간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저는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인가. 누군가에게 무한하게 순환하며 좋은 영양분을 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늘진 틈 사이로 들어선 해를 보면 위수는 그런 삶을 생각했다.

저 멀리 창근이 수확 후 말라비틀어진 들깨 대를 치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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