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곳곳을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감들은 숙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늦여름 더위를 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지금.
감의 광택이 나는 주황색 껍질을 만지면 매끄럽고 단단했다. 단단함은 가을이 완전히 익어도 물렁해지지 않았다. 물기가 많지 않아 서걱서걱 달콤함이 씹히는 단감과 초겨울까지 익히면 물렁해져 홍시가 되는 대봉, 홍시가 된 감의 씨를 감싸고 있는 살은 쫀득쫀득하여 마치 젤리를 씹는 맛 같았다.
그렇게 감이 익어 가는 그 가을은 벌써 왔고 들판은 익어가는 과실들로 풍성함을 뽐냈고, 하늘은 더없이 파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 흰 금을 만든 것은 시어머니의 쩌렁쩌렁한 땡볕 같은 날카로움이었다. 하늘에 찔러대는 날카로움이 부딪혀 하얀 구름을 만들어 냈다.
"어허, 어서 올라서지 않고, 뭐 하고 있노?"
마루로 올라서지 않고 서 있는 위수를 향해 시어머니의 노함이 박혀왔다. 잠시 아기 시누이의 해사한 얼굴을 보고 있었는데 그 잠시도 시어머니는 허용하지 않았다.
미처 위수가 답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버리는 시어머니를 따라 마루로 올라섰다. 한지로 빡빡하게 창살을 붙여 놓은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한약 냄새가 위수의 코를 찔렀다. 따끔따끔한 한약이 코를 자극해 왔다. 연신 기침을 하고 계신 시아버지의 약일 것이었다.
코에 한약이 익숙해질 때쯤, 안방 한 면을 채우고 있던, 새까만 별 없는 밤을 닮은 검정 바탕 위에 자개를 박아 만든 8 자 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에 바로 자개를 붙이지 않고, 칠한 바탕 위에 자개를 붙이고 다시 칠을 올린 뒤 표면을 연마하여 무늬가 드러나게 한 것이 영롱했다. 자개장은 큰 별이 박혀있는 듯했다. 풀을 밟고 서 있는 사슴은 두 마리였다. 한 마리는 고개 돌려 저 위 구름과 함께 떠있는 달을 보는 듯한 형상이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슴이었다. 그것이 달인 지, 나무 위를 앉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나비인지는 모르나, 한 마리의 사슴의 꺾인 고개를 말해주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노라고.
어쩌면 위수가 살면서 한 마리의 사슴처럼 꺾인 고개를 돌린 채 살아야 하는 것을 자개장 속 사슴은 아마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시댁에서의 시집살이는 그렇게 자개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매서운 시어머니의 눈빛보다 더 위수를 위축되게 한 것은, 한 마리 사슴과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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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바빴다. 아기가 없는 위수지만, 2살 배기 시누이를 먹이고 씻기는 것은 위수의 몫이었다.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시누이는 잠시만 눈을 돌려도 넘어지지 일쑤였다. 흙 마당 위의 잔잔한 돌들은 시누이의 무릎을 하루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잔잔한 돌은 넘어질 때마다 박히어 와 울음바다를 만들어 버렸다.
그날도 그랬다.
위수가 잠시 사랑채의 아궁이를 살피고 있었다. 곧 학교에서 돌아올 학생인 두 서방님을 위해 불을 피워 두어야 했고, 소죽을 끊여야 했다. 가을 내 모아 두었던 짚과 콩탈곡, 자투리 콩을 넣어 소죽을 끊이며, 방안을 덥히고 있었다. 시골에서 겨울은 성큼 오고, 추위는 그것 보다 한 발 앞서 왔기에 두 서방님을 추위에 떨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소죽이 펄펄 끊어 갈 때였다. 우리에 있던 소도 냄새를 맡았는지 킁킁 소리를 내고 있었다.
조금만 기둘리거라. 다 되어 가니. 소들을 한 번 돌아보고 위수는 달래 듯 중얼거렸다.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달램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으앙앙앙..."
뒷마당 쪽에서 들려온 울음소리에 놀라 위수가 뛰어갔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아기 시누이의 무릎에는 시퍼런 피가 나고 있었다. 위수가 놀란 시누이를 안아 들고 달랬지만,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애기씨 쪼금 그랬어. 울지 마여. 내 안아 줄게. 응응"
몇 번을 다독여도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어쩌다 넘어진 것인지는 몰라도 시누이가 많이 놀란 듯했다. 아이를 키워 보지 않은 위수는 그저 달래고만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이를 어쩌나,,,,
발만 동동 거릴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끊이지 않는 울음소리에 시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시퍼런 눈은 앞마당을 살피고 이어 소리를 따라 뒷마당을 향했다.
"뭔 일인데 이리 시끄러우냐?"
"애기씨가 뒷마당에서 놀다가 자빠지삤어요."
시누이를 안고 나온 위수가 우물쭈물 답했다.
"너는 어찌 된 것이 시누이 하나를 못 봐서, 남편 보좌를 하기를 해, 니가 하는 것이 뭐에 있다고, 애 하나를 못 봐"
쯧쯧 혀 끝을 차며 시어머니가 시누이를 넘겨받았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오늘처럼 시누이가 혼자 놀다 넘어져도 모든 것은 위수의 탓이 되었다. 자그마한 아이를 따라다닐 수도 없지 않은가?
핑, 눈물이 돌았다.
이럴 때 남편이 있었다면 기댈 수 있을까. 주말이면 올 그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은 위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은 도시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주말에만 내려오곤 했다. 그것도, 시험기간이 걸리면 건너뛰기 일쑤였다. 위수는 기다림에 익숙해져야 했다.
살얼음판 같은 시댁에서 홀로 지새워야 하는 밤이 길어질수록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져 갔다. 자신을 보고 살갑게 웃어 주지 않더라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위수는 시집온 이후 알게 되었다.
****
따뜻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자개장을 보면서 물었다. 여전히 자개장에는 목이 꺾여 달을 혹은 나비를 보고 있는 사슴 한 마리가 있었다. 발 끝으로 툭 자개장에 박혀있는 사슴 한 마리를 찼다. 목이 꺾여 돌아간 사슴이었다.
"할매, 애기 시누이가 눈데? 진주 고모 할매? 해운대?"
나는 어렴풋이 두 분의 고모 할매 중 한 분일 거라 생각해서 물었다. 엄마와 나이차이가 나지 않는 엄마의 고모들. 엄마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는 엄마의 고모들, 엄마가 중간에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인 고모들.
나의 물음에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겨울밤을 때리는 창호지만 바라 볼뿐이었다.
"누구냐고? 해운대?" 빽 소리를 지르고 나자 할머니가 나를 보았다.
"해운대는 뒤에 태어났고. 내 시집오고 이듬해 태어났다 아이가."
"아, 진주 고모 할매네."
나는 그제야 해답을 얻고 돌아 누웠다.
"근데, 할매, 할매 시엄마, 외할배 친엄마 맞나? 새엄마 아이가. 아이몬 첩, 아이몬...."
탁.
철 없는 나의 질문이 채 다 끝내기도 전에 할머니의 손이 내 등허리를 때렸다. 나는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예전에는 그런 일이 많았으니, 말이다. 요즘 읽고 있는 '혼불' 소설만 봐도, 부인이 있고 아끼는 여자가 있었다. 그 시대 첩이 있는 것은 흔한 일인 듯했다. 소설 속에 흔하게 등장하는 그런 것인 줄 알고 물었던 나는 등허리를 맞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가시나 몬하는 소리가 없다. 예전에 누가 다 그랬다 하데? 다 큰 가시나가 못하는 말이 없노!"
한마디 더 하려다가 나는 매섭게 나를 내려다보는 할머니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의 눈치를 살살 보다가 나는 품으로 파고들었다.
"할매, 춥다."
사실 춥지 않았다.
그냥 품에 파고들고 싶었다. 어린 시누이까지 키워야 했던 할머니의 젊음이 그냥 슬펐다. 이유는 잘 몰랐지만, 그냥 파고들었다. 할머니의 품으로.
아마 나보다 겨우 두세 살 많은 나이였을 할머니가 겪은 일들이 꽁꽁 언 고드름 보다 더 시렸기 때문이었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