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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영 Feb 18. 2024

4화 늦여름 결혼식



"할매, 와 학교 그만뒀는데?"

나는 다음 날 다시 물었다. 어렴풋이 결론을 내렸지만, 궁금했다. 부엌에서 저녁 상을 차리던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에서 나는 15살 문학소녀 할머니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할매, 와, 와 그만뒀는데. 와 말을 안 해주노?"
자유보다 나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를테면 잊지 못할 첫 남자와의 첫 이별 같은 그런 씁쓸하지만 달달한 이야기를 찾고 있었다.

"참말로 가시나 말 많네, 그 넘의 머리나 댕강 잘라삐라."

얼토당토않게 나의 머리가 할머니의 저격 대상이 되었다. 벌써 일 년 가까이 애지중지 길러오고 있는 머리카락을 할머니는 늘 못마땅해했다. 이유는 많았다. 물값, 샴푸 값, 기름보일러 값, 그리고 방바닥을 날아다니는 검고 긴 머리카락이 싫었던 듯했다.

외갓집에 내가 지내기 시작하면서 할머니와 나는 하나의 이유로 자주 말다툼을 했다. 나는 매일매일 머리를 감아야 했고, 할머니는 머리 기름 빠지니 삼일에 한 번 감으라 했다. 매일 잔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매일 머리를 감았다. 짧은 파마머리, 꼭 미나리 밭 물결을 닮은 할머니는 모르는 나만의 긴 생머리 세상이 그때는 있었다.

입을 삐죽 댓빨로 내밀고 있는 나를 보고서야 할머니는 마지못해 말했다.

"배워서 뭐하노. 뭐 할 수 있는 기 있나. 갈 수가 있나."
그 말끝이 나는 왜 슬펐을까? 그 후로 몇 해를 더 생각했지만 알 수 없었다.


****

잠시 멈추었던 전쟁이 끝나고 또 몇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외수의 집에 언젠가부터 중매쟁이가 찾아들었다. 중매쟁이와 새 언니의 만남이 잦아지고 있었다. 외수는 들려오는 소리로 결혼 문제가 대두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쯤 위수 집안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으니, 큰 오빠는 더 가세가 기울기 전에 외수를 보내고 싶어 했다. 위수가 이 사실을 안 것은 후에 일이었다.


그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늦여름의 어느 저녁 외수의 결혼은 결정되었다. 건너 건너 마을 총각이라고 했다. 외수와 같은 나이의 사내라고 했다. 그 외 외수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없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15살의 외수가 사라진, 그날 이후 문학소녀 외수도 사라졌다. 한 인간 외수는 사라졌고, 가족 안에서 책임이라는 무게를 견디어야 할 외수만 남았다.

결혼식을 앞둔 밤, 큰오빠는 외수를 불렀다. 연못가에 서서 아무 말이 없었다. 외수가 옆에 서 기다리는 것을 알았지만, 달에 비치는 물결만 볼 뿐 외수를 돌아보지 않았다. '큰오빠'하고 부를까 했지만 외수는 말았다. 물결이 흔들렸고, 큰오빠의 큰 어깨도 잘게 떨렸기 때문이었다.
오빠도 나의 결혼이 기쁘지만은 안다는 것을 떨리는 어깨로 전해졌다.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 같은 막냇동생을 다른 집에 보내기까지 깊은 고민을 했으리라.  

물결이 잦아들 때쯤 돌아선 오빠는 외수의 어깨를 보았다. 아직 아이 같은 누이동생을 보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여름 무더위를 밀어내며 태어나던 그날의 애기 울음소리를 떠올렸다. 고통에 신음하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안채 뒤편에 서서 어머니의 고통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던 18살 은오의 모습도 겹쳐져 지나갔다. 집안의 가장으로 외수를 지키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이 몰려왔다. 떨리는 어깨는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었으리라.

"잘 살그라, 시부모님 말씀 잘 듣고 신랑 말이 법이다 하고 알긋냐."
오빠의 말끝은 흔들렸고, 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이 있던 날까지 외수는 신랑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학생이라는 것만 알았고, 외수가 사는 곳에서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에서 산다는 것만 알았다. 그에 대한 것은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한다면 알 수 있었을 터였다. 허나, 외수는 묻지 않았다. 밤나무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걸 받아들인 순간 중요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 생각하고 따지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

신랑과 신부가 한 가정을 이루는 혼례식은 위수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북적북적한 사람들 틈에서 위수는 혼례식을 기다렸다. 문밖으로 들리는 소란스러움에 궁금증이 일터인데도 외수의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그 밤 잘살라는 오빠의 말에 고개 끄덕이던 그 모습 그대로 위수는 혼례식을 기다렸다.


신랑이 입장하고 기럭아비가 뒤를 따르며 기럭아비가 기러기를 신랑에게 전하고 위수는 집에서 신랑을 맞이하면서 혼례식은 시작되었다. 전안상 위에 기러기를 내려놓고 신랑이 두 번 절하고 위수네 집에서 기러기를 받아 방으로 들이면서 결혼을 승낙한다는 의식을 행했다.
신랑신부가 초례청에서 인사를 나누며 서로 마주 보았다. 이때 위수는 처음으로 신랑의 얼굴을 보았다. 같은 나이라고 했던 신랑은 자신 보다 한 치는 더 커 보였다. 딱 부러진 어깨가 눈에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작은 새 같은 외수와 달리 큰 키에 넓은 가슴을 가진 사내였다. 그 넓은 가슴이 위수의 마음도 따뜻하게 안아 주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사내의 넓은 가슴은 위수가 아닌 타인을 위해 늘 열려 있었다. 처음 신랑 될 사내를 보았을 때는 넓었던 가슴은 마지막 가는 길에서 조차 위수를 안아 주지는 않았다.

위수가 먼저 두 번 절을 한 후 신랑이 답배로 한 번 절을 했다. 이렇게 두 번을 반복하면서 부부가 서로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면서 교배례는 끝이 났다. 신랑 신부가 한 표주박을 둘로 나눈 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의례인 합근례가 진행되며 혼례가 성립되었음을 알렸다. 이렇게 위수는 김위수에서 오창근의 아내로서의 첫 발을 내 디뎠다.

 
끝나가는 늦여름이 무더위로 애를 태우고 있었던 날이었다. 과실이 잘 익으려면 더위는 물러가고 가을 햇볕이 몰려와야 하는데 아직 더위가 애를 태우고 있었다. 과실이 실하게 익지 못하고 제 맛을 다 내지 못할 것이 뻔한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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