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밀어내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이었다. 닫힌 안채의 방에서는 고통을 참으며 신음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문풍지를 뚫고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곁을 지키는 큰 딸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묻어 나왔다. 해산을 돕고 있는 산파 할머니는 고통에 몸을 뒤트는 여자를 향해
'조금만 더 힘내이소! 쫌만 더'를 외치고 있었다. 뒤틀던 여자의 신음 소리가 잠시 멈추었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힘이 빠져 버린 여자는 털썩 고개를 떨구었다.
"딸입니더. 아이고야 딱 니를 닮았다.
"
해산을 돕던 진주댁이 기쁨에 차 여자를 향해 말했다. 고개를 떨구었던 여자는 진주댁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1936년 한여름의 무거운 바람을 밀어내며 그렇게 외수가 태어났다. 따가웠던 태양에 모든 것이 말라가던 8월 밤나무집에서 들린 울음소리는 우렁찼다. 몇 해 만에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뒤뜰을 서성이던 김 씨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작은 연못에 잎을 뻗치고 있는 연꽃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안채 쪽으로 향했다.
어느 틈엔가 뿌리를 내리던 잎은 뿌리줄기에서 나와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고 나서야 잎자루 끝에 잎이 달렸다. 둥근 잎은 물에 젖지 않아 밋밋한 가장자리를 뽐내었다. 연꽃이 해를 달리하면서 뿌리를 깊게 연못에 박아 내려왔듯이 김 씨 일가도 밤나무 산자락 아래에서 그렇게 뿌리를 내려왔다.
뒤로는 밤나무 산을 두고 앞으로는 저 멀리 흐르는 내를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에 자리 잡은 저택은 기운을 뻗치고 있었다.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지만 말을 타고 지나갈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집의 구조가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이가 어떤 이인지 짐작케 했다. 대문 오른편에는 나지막한 하마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문간방, 마구간, 곳간, 부엌이 자리 잡고 있고 바깥 행랑채 오른편에는 사랑채로 연결된 협문이 있었다.
저택 곳곳에 지금은 비록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은 듯이 살고 있다 하여도 예전의 그 당당함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100년 흘러간 세월도 그 당당함을 씻어 보내지는 못했다. 세월로 어찌하지 못한 기세는 말해주고 있었다. 돌담 구석구석 깔끔하게 다듬어진 사이사이가 말해주고, 기와 끝에 달린 물방울의 단아함이 아직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다 말해 주었다.
안채에 들어 서면 작은 화단이 있었다. 봄이면 수선화가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수국이 작은 화단을 수놓는 곳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한 화단은 안주인을 닮았다.
외수는 응골 마을 7남매 중 밤나무집 막내딸로 태어났다. 마을 끄트머리에 자리한 그 집을 사람들은 그리 불렀다. 밤나무집은 증조, 고조, 그 이전부터 그곳에 터를 잡고 자손을 번성시켜왔다.
밤나무집은 김 씨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또 할아버지가 응골 마을 끄트머리에 터를 잡고 산 것은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본디 김 씨의 조상들은 평안북도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중앙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지역주민들이 차별을 참지 못하고 난을 일으켰던 해에 터전을 버리고 멀리 떠나왔다. 난은 차별받았던 서북인들이 일으켰다고 했다. 허나, 서북인을 중요한 자리에 임용하지 않은 것은 사실로 보이나, 이것이 그 시대의 정책은 아닌 듯했다. 선조 때 이이가 서북인의 지방관이 되는 자가 적으니 지방 인재의 등용을 추진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니 불평불만이 생겼고, 이는 난으로 이어졌을리라.
난이 일어나던 해 김 씨의 조상은 고향을 버리고 아는 이 없던 응골로 내려왔다. 어쩌면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그들은 떠밀려 왔다' 표현이 더 맞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땅, 같은 하늘 아래 있는 땅이었지만, 육지 밖 섬 같은 곳이었다. 조류에 밀리고 밀려, 인류에 밀리고 밀려 한양으로 충남으로, 한강을 따라 남강을 따라 밀리고 밀려 육지 밖 땅으로 밀려왔다. 지도 위에 그려 보면 가까우나 심리적으로는 멀고 먼 서부 경남의 어느 마을로 밀려왔다.
글만 읽어 내리던 그들이 새로운 곳에 터전을 잡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가진 것이 없다 하나 양반의 피가 흘렀던 그들이 흙을 파먹고 살기란, 물건을 파는 일을 하기란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뭐든 해야 했던 그들은 없던 땅을 일구었고, 곡식을 거두었다. 그렇게 거둔 곡식이 그들의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게 했다. 멸시했던 물건을 사고파는 일은 지금 그들의 뒷산을 채우고 있는 밤나무가 되었고, 감나무가 되었다. 그렇게 살아 내었다. 떠밀려 온 이곳에서 그들은 또 터를 잡고 자손을 번창시키고 있었다.
'응애응애'
김 씨는 귓가를 또 한 번 울리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상념에서 돌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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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는 6월 여름 벼가 자라 듯이 성장했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 물을 대어 주기가 무섭게 아이는 그렇게 자랐다. 7남매의 막내. 위로는 큰 오빠가 18살이었고, 그 밑으로 큰 딸은 16살이었다. 줄줄이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었다.
위수가 태어나고 다음 해에 큰 오빠는 장가를 들었고 새 언니가 집으로 들어왔다. 위수는 걷기 시작했고 새로 들어온 언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위로 언니 오빠들이 있었지만 학업을 위해 큰언니와 오빠들은 모두 외지에 나갔다. 주말이 되어서야 볼 수 있는 그들보다 매일 얼굴 마주치는 새 언니를 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새 언니는 그런 위수를 처음에는 어색해했다. 남편이 자식처럼 아끼는 동생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직 10대였던 새 언니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터였다. 언니들이 있었지만, 학교를 다니는 언니들이 위수의 놀이 친구가 되어 주지는 못했다.
총총거리며 새 언니를 따라다니던 위수가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고, 어머니는 몸져누웠다. 시부모와 7남매를 키우던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그렇게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안채 앞 작은 화단을 지키던 한여름의 수선화 같던 여자는 하루하루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시들어 가던 어머니는 가을이 익어 밤송이가 입을 벌릴 때쯤 위수를 두고 떠났다.
15살.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소녀가 되었다. 더 이상 새 언니를 따라다니지 않았고, 문학 책을 곁에 두고 잠드는 소녀가 되었다. 총총 걸음으로 마당을 뛰놀던 아이는 사라졌다. 대신 연못에 앉아 연꽃을 바라보는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뿌리줄기에서 나온 잎이 퍼지는 자리를 바라보며 잎자루 끝에 달린 잎맥을 찾는 소녀가 있었다. 마치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처럼 소녀는 그렇게 잎맥 끝에서 끝을 따라 찾고 있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그들의 답답하여 못내 가슴을 칠 때는 달빛에 비쳐 잔잔한 물결을 이루는 연못을 보았다. 쭈그리고 앉아 툭툭 떨어지는 눈물이 만들어 내는 파장을 따라 흘러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소녀가 있었다. 어디로 흘러가고 싶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흘러가고 싶었던 소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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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그람 할매는 부잣집 딸이었나?"
내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중간에 이야기를 끊었다.
"와? 외할배랑 결혼했는데. 외할배는 글만 읽을 줄 알지.... 뭘 할 줄 알아서."
18살에 외할머니가 시집와서 모든 경제를 책임졌다는 것을 익히 엄마에게 들어서 아는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제 막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는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할머니는 밉지 않게 나무랐다.
"가시나가 못하는 말이 없다. 너그 외할배가 알아주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이 근방에서는 그런 사람 없었다이~ "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의 눈에는 반짝거림이 가득했다. 나는 처음 본 할머니의 반짝 거림이었다. 눈동자가 빛나는 것은 어린 아이나, 소녀들에게서나 볼 수 있다가 생각했었는데 나는 그 밤 할머니에게서 보았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근처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나는 할머니 집에 남았다. 이유는 할머니가 엄마에게 혼자서 겨울밤이 무섭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차로 10분 거리에 사는 부모님이 자주 찾았지만 할머니는 무섭다고 했다. 나는 사실 몰랐다. 무엇이 무섭다는 것인지 나는 몰랐다. 후에 아주 후에, 내가 홀로 된다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때 알았다. 왜 그 해 겨울 할머니가 무섭다고 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