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가장 한가운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누구는 300년이 되었다 하고, 또 누군가는 500년이 되었다 하는. 뿌리에서 나온 여러 갈래의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끝 모른 채 뻗어 있었다. 나는 늘 가지 끝이 궁금했다. 그 끝에 무엇이 있길래 어른들은 나무에 무언가를 빌고 또 빌었던 걸까.
어느 날에 음식이 놓여 있었고, 어느 날에는 새끼줄이 나무를 감싸고 있었고, 어느 날에는 붉은빛, 푸른빛이 새끼줄 곳곳에서 펄럭이었던 나무. 무엇이 사람들을 이곳에 모이게 했던 것이었을까.
오랜만에 외갓집을 찾은 나는 나무의 뿌리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아래 흙을 뚫고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듯한 뿌리의 울음을 보고 있었다. 꺼내 주고 싶었다. 답답함에 자신을 꼬아 대는 그의 고통을 줄여 주고 싶었다.
발로 툭툭, 흙을 파기 시작했다. 하얀 운동화에 먼지가 묻기 시작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팍팍 나의 발길질이 더해질 때쯤, 오촌 아제가 골목길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머하노? 가시나가. 안 들어오나?"
스포츠머리에, 동글동글 보다는 똥글똥글한 얼굴, 피부가 까만 아제가 다가오면 나를 나무랐다. 나보다는 6살 많은, 엄마의 고종 사촌.
5촌 당숙보다는 동네 오빠 같은 존재로 우리 형제들과는 친구처럼 지냈던 아제였다.
부름에 휙 돌아보았지만, 나는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퍽퍽퍽.
주먹으로 머리통을 한 대 맞고 나서야 나는 발길질을 멈췄다. 눈을 부라리며 '왜 나를 막느냐' 눈빛을 아제에게 보냈다.
"큰 누야가 데꼬 오란다."
나의 부라림이 억울하다는 듯 엄마가 나를 찾는다고 말했다. 나는 툴툴거리며 반항하듯 또 한 번 사당나무뿌리를 파 주었다.
'조금이라도 편해 지거라. 그 몸부림 그만 멈추거라.'
골목을 들어서면서도 나는 고개 돌려 뿌리에 이야기했다.
골목 끝에는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을 바로 옆에 두고 외갓집은 자리했다. 양철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사랑채가 바로 보였다. 마루와 작은 방이 두 개, 아궁이가 있었다. 방의 아랫목에는 아궁이의 열을 이기지 못하고 검은 갈색으로 타버린 낡고 오래된 장판이 있었다. 그 아랫목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항상 났다. 코를 박고 맡으면 기분이 좋아졌던 엄마의 젖 냄새 같은 곳이었다. 내게는.
아궁이 옆에는 소 두 마리가 있고, 그 옆을 돌아 서면 화장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외양간 앞에는 수돗가가, 그 앞에 부엌이 있었다.
본채의 안방과 작은 방은 기름보일러 공사를 몇 해 전하여 현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당은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지점 같았다. 아궁이에 의해 방을 따뜻하게 해야 하는 과거의 사랑채와 기름보일러로 언제든 따뜻함을 가져올 수 있는 현재의 본채는 늘 그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나를 찾던 엄마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창고 앞에 자리 잡았다. 겨울의 시린 바람이 까슬까슬했지만, 햇빛이 비추고 있어 괜찮았다.
마당을 가로질러 다니는 흰 물결 속에서 나는 가만히 앉아 바라보았다. 흙먼지들이 물결을 점점 누렇게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물결 속에서 어느샌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짤딱만한 키에 햇볕에 그을린 피부, 주름 때문에 볼이 움푹 파인 작은 얼굴의 여자를 보았다.
검게 주름진 손등이 빨갛게 익어 가는 것을 보니 아마도 한참 전부터 저곳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햇빛에 누렇게 뜬 옷을 입은 할머니가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창고 앞 돌 위에 앉아 그런 할머니의 날리는 하얀 치마, 빛을 받아 누렇게 보이는 자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한참 전부터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했다. 집안사람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나는 오고 가는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 창고 앞 돌 위에 앉아 겨울의 시린 바람을 받아 내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뽀글뽀글한 할머니의 파마머리가 미나리 밭 붉은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서쪽하늘에는 이제 막 지기 시작한 해가 붉기를 더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겨울 철새라도 저녁잠을 위해 날아가야 했는데 그날은 철새들 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할머니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아마도 어느 순간을 보내주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만, 펄럭이는 치맛자락의 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만, 지화에 싸여 먼 길을 떠날 남편의 순간을 보내 주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만, 땡볕 8월 어느 순간에 꽃 피우는 도라지 밭 옆에서 남편이 쉴 수 있는 순간을 보내 주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사라지는 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60년 삶의 어느 한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순간은 세월의 무심함도 아니었고, 큰 아들의 아픔도 아니었고, 모질었던 시집살이도 아니었고, 쉽지 않았던 시절도 아니었다.
수많은 삶의 순간순간에 있었던 연속된 순간들 중에 이별의 순간을 할머니는 보내고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되고 할머니의 서쪽하늘의 의미를 어렴풋이라도 알게 되었을 때 내린 답이었다. 할머니는 다만 '순간'을 보내 주고 있었다고.
붉게 물든 노을이 어둠에 잠식되어 검붉어질 때쯤 할머니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도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눈이 마주쳤다. 나는 처음으로 보았다. 할머니의 붉어진 눈에 고여 떨어지지 못하고 있는 방울을 보았다. 참고 있는 것이었는지 삼키고 있는 것이었는지 방울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내게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그 걸음 속에서도 방울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흙먼지 속으로 떨어진 것은 맺혀 있지도 않았던 내 눈물이었다.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다가오는 할머니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후두두둑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물방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참아 주지 나는 원망의 시선을 먼지 속으로 보냈다.
차가워진 돌 위.
나의 옆에 할머니는 앉았다. 고개 돌린 채 온기가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먹으로 쓱쓱 닦아 냈다.
"울 필요 없다."
주먹을 옷에 닦아내는 내게 말했다.
"갈 때가 되면 다 가는 기라. 운다고 가는 사람이 온다 카더나."
할머니는 사랑채 아궁이를 태우고 있는 나무 장작을 보며 말했다. 아궁이에는 끝내 불태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고 있는 외할아버지의 삶이 꽃이 되어 피우듯 그렇게 활짝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오늘, 내일,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면 외할아버지는 사라질 것이었다. 다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 있을 터. 허나, 지금은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거칠고 까슬거려 피부에 닿으면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삼베옷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돌아가시게 한 죄인이라는 의미로 반성하고 자중하는 의미로 입는다는 하얀 옷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외할아버지를 보내고 있었고 나는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