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와 빛나는 추억, 그 사이에서
엄마, 내 방에 칸쵸박스 엄마가 버렸어??!!!
목소리의 톤을 보아하니 뭔가 빨간색 경보음이다.
"아니, 너는 과자를 맨날 그렇게 먹다 말고
제대로 버리지도 않고 방에 쌓아두면 나중에 벌레생기고 냄새나! 좀 치워라 응?"
평소에도 여기저기서 받아온 간식이며, 본인이 좋아해서 집에 들어오며 사 온 과자 등을
방에서 먹다가 눅눅해진 채 4분의 1쯤 남겨놓고 안 치우고 둔다거나,
다 먹은 박스나 비닐을 발아래 휴지통에도 안 넣고 펼쳐놓는 즉흥적인 딸이라...
계획적이고 정리를 해야 하는 엄마는 머리뚜껑이 열릴 것 같지만 사춘기 사춘기... 마음속으로 백번을 외치며 아기새가 없는 시간에 쓱 정리를 해주곤 했다.
그날도 분명 똑같이 쓰레기를 걷어다 방정리를 해준 것인데,
"그럼, 따로 정리해 두던지, 버리지 말라고 엄마한테 말을 했어야지.
그게 누가 봐도 쓰레기지, 누가 버리면 안 되는 귀중품으로 보이겠어? 그리고 그 옆에도 다른 과자 비닐이랑 휴지랑 쓰레기가 있어서 같이 치운 거고, 엄마가 매번 이렇게 치워줬는데..
솔직히 이건 누가 봐도 쓰레기잖아~!"
엄청 화가 났는지 한마디도 안지는 아기개가 되어 짖는다..
"그럼, 나도 엄마방 가서 쓰레기라고 생각되면 말도 안 하고 버리면 되겠네?"
어라? 이 녀석 선을 넘는데...??
이 날따라 나도 엄마개가 되어 으르렁 거렸다.
"너, 말 예쁘게 해... 너 태어나서 엄마방 한 번도 정리해 준 적 없는데, 지금 엄마한테 협박하는 거야?
네가 평소에 늘 방도 깔끔하고 과자 먹은 뒤처리도 깨끗했으면 엄마가 대신 치워줄 일도 없고, 이걸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 근데 맨날 더러우니까 엄마가 계속 치워준 거 아냐!"
이 사건으로 우리 집은 약 3일간 냉전이 흘렀다.
1~2년 전쯤에 친한 회계사님이랑 식사를 하다가 회계사님이 딸 방에 BTS 퍼플에디션으로 나온 진라면을 끓여 먹었다가 집에 어마무시한 전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남 이야길 들어본 적 있어도 이렇게 내게 날벼락이?? 이건 도무지 무방비 상태 아닌가.
여기서 마무리되었음 그나마 다행인데, 나도 그날은 유치하기가 유치원에 가야 할 수준이 되어
딸을 향한 괜한 심술이 폭발했다.
"너, 이참에 말하는데, 과자 쓰레기만 말하는 게 아니야. 너 왜 양말을 하루에 두 번이나 갈아 신으면서 맨날 뒤집어서 공 만들어 놓는 거야. 왜 먹고 난 물컵은 싱크대에 안 가져다 놓고....
엄마가 백번도 넘게 이야기했는데!!"
아차,,, 말을 뱉고 나서 괜히 말했다 싶기도 했다.
어릴 때 엄마한테 야단맞을 때 제일 싫었던 때가 그 순간의 사건만 혼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2절, 3절 몇 년 전 일까지 나올 것 같은 대서사를 듣는 게 나조차 엄청 싫었고,
엄마한테 밖으로 한마디도 대들지 못하면서 마음속으로는 한마디도 안 지고 엄마말에 대들고 있던
나의 사춘기 그 시절.
아뿔싸. 팽팽한 긴장감과 치닫는 감정 속에 유치 찬란해진 나를 보며,
'오늘의 싸움은 내가 졌구나'라는 걸 직감했다.
그런데 바로 사과할 수 없었던 건, 서운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띠동갑 늦둥이 남동생이 있었던 나는 청소나 설거지, 빨래정리와 같은 요리를 제외한 살림을 제법 많이 도와드리며 K장녀 노릇을 했었다.
남동생을 워낙 예뻐해서 그렇게 부모님을 돕는데 큰 불만이 있지는 않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었던 건 아닐까 종종 그 시절의 나 자신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그런 나여서 사실 하나뿐인 내 딸에겐 청소도 설거지도 시키지 않고 키워왔다.
.
누군가는 기본은 할 줄 알아야 한다고도 하고, 스스로 자립심을 키우기 위해 필요하다고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집안일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기에, 굳이 그렇지 않아도 싱글맘에 워킹맘 아래서 혼자 해야 하는 순간들이 넘치게 많을 아기새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애틋한 마음도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선 늘 최선을 다해주고 싶던 마음이었거늘.
유치하게 아이 앞에서 생색을 내려했던 건 아니지만,
그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그깟 칸초 몇 알 들어있는 쓰레기 같던 상자를 버렸다고,
저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어
여느 때 같으면 슬쩍 농담하며 넘어갔을 일을
나도 자존심을 꼿꼿하게 세우고, 가자미 눈을 하고 냉전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화가 나고 서운한 상태로 이틀이 지나고 사흘 째 되던 날,
인★를 보다 보니, 나이를 나만큼이나 먹은 손예진도 칸쵸 무더기에서 '예진'과 '현빈'을 찾아서 사진을 올려놨네.
애나 어른이나.... 요즘 유행이구나.
왜 난 맨날 한발 뒤에서 알게 되는지 ㅎㅎ
갑자기 조금 머쓱해지고, 미안해진다. 아기새에게
원래 김춘수 시인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진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지 않았던 그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며 나의 꽃이 되었다고 했는데
우리 아기새에겐
이 칸쵸...
그냥 먹었을 땐 초콜릿과자 부스러기에 불과했지만,
몇 알 남겨둔 칸쵸는
자기 이름이 새겨진 고유한 의미이자,
그리고 먼 훗날 그때 그랬지를 연상할 수 있는 지금 이 시절의 낭만이자 추억이 될텐데..
내가 그만한 나이일 때
잡지 어느 페이지에 게* 같은 브랜드에 외국모델 사진을 보면 예뻐서 찢어서 소중히 보관하다가
친구에게 편지지로 사용해서 마음을 전했던 것처럼,
그때 그 종이조각이 재활용 쓰레기가 아닌 내게 소중했던 의미였던 것처럼
사회생활을 하기에 그래도 내 또래보단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아이들이 사용하는 말,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역시나 역부족이고, 나도 꼰대는 꼰대구나 ㅎㅎ
괜히 미안해지고, 부끄러워져서,
쿠*에서 칸쵸 6개 세트를 주문했다.
열심히 한번 다시 찾아보라고, ㅎㅎ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건, 아기새의 이름은 아주아주 흔한 이름 중에 하나라 내 장담하건대 저 6개 박스에 2~3개는 나올 것 같다는 것)
택배가 오면 슬쩍 밀어 넣어주고, 어쩌는지 훔쳐봐야지,
그리고 내 이름도 하나 찾아달라고 해서 나도 꼰대지만 아닌 척 사진 찍어 올려봐야지.
남들이 다 부러워할 명품백이나
두르고 다니기도 부담스러울 다이아 목걸이도 선물 받아봤지만
정작 살면서 내가 가장 소중한 선물로 가슴이 기억하는 건
나를 기다리며 손에 잡히는 메모지에 끄적끄적 그려줬던 우리 동네, 우리 집 그림이나
어느 외딴 바닷가에서 나를 기억하며 조심스레 고르고 골아서 전해줬던 엄지손톱만 한 몽돌이었다.
아이를 무릎에 눕혀놓고
살살살 귀지를 파주던 귀이개를 잃어버리면,
그 물건이 결코 비싸거나 구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아이의 성장만큼 함께 해 온 시간, 소중한 순간들을 잃어버린 것 같아
그 새끼손가락만 한 귀이개 하나 잃어버린 게 그렇게 허전하고 속상하지 않았던가.
며칠 뒤 칸쵸가 가득 든 상자를 열어 보여주며
미안하다는 내 사과에
아기새는 키득키득 웃으며 "여기서 안 나오면 어쩔 거야"라고 장난스럽게 대꾸하지만,
입꼬리는 이미 귀에 걸려있다.
사십 대가 될 때까지
참... 남에게 신세 안 지려고 노력하며, 사과할 일은 만들지를 말자며
스스로를 엄하게 단속하며 살아오느라,
사과를 하는 건 참 익숙지 않았는데
아니, 어려운데
부모님께도 죄송하단 말이 잘 안 나오던 콧대 높은 나를
그리하여.... 이름이 새겨진 칸쵸는 다시 이렇게 짠!!
ㅎㅎ
그리고 여전히 아기새가 좋아하는 그 칸쵸는
이제는 돌아가신 아기새의 할아버지의 마음과 추억이 있던 과자인데
아기새는 그 시절은 기억을 하는지 모르는지
자기 이름이 새겨진 칸쵸 한 알에 세상 다 가진 행복을 느끼고,
어쩐지 볼 때마다 나를 조금은 울컥하게 했던 그 핫핑크 박스는
이제는 웃으며 아기새와의 오늘 "내 이름을 찾아줘"를 떠올리게 하겠지.
※ 참고 : 예전 눈물의 사연이었던 칸쵸...
https://brunch.co.kr/@nana0974/168
(근황)
아기새 이야기는 늘 '지금'의 이야기가 '쌓아둔'이야기를 앞질러 버리네요
오랜만의 이야기로 돌아왔어요.
가을의 문턱에서 조금 지치는 시기도 있었지만,
토닥이는 마음에 위로도 받고, 말없이 등을 내주는 나무에 기대어 힘도 내어봅니다
게다가
아기새가 나름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
집사인지, 상궁인지, 주모인지, 엄마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ㅋㅋ
최상의 서비스로 열심히 맞춰드리고 있습니다.
회사도 바쁘기도 했고요.
궁금해해 주시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