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하게 자라렴, 아기새야
요즘은 같은 시기엔 임신을 하면 태교 모임도 한다던데,
나 때도 같은 조리원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한동안 빡빡이 아가들을 대동한 조리원 동기 모임이 있었지.
그 외에도 이어지는 문화센터,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학원, 군대, 회사, 맘카페 등등....
아이를 키울 때뿐이던가.
고향이 부산이었어? 해병대 나왔어? 새로 온 임원이 oo대 출신이래...
분명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존재감을 뽐내며 태어난 우리 각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에 나옴과 동시에 누구누구의 아들, 딸로, 동생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 조직의 구성원으로 소속이 확정된다.
그렇게
고유한 개인으로 태어났지만 언제나 어느 조직의 구성원으로 소속되어 살아가는 존재,
독립적이길 원하지만 늘 어딘가 소속되어 있고,
자율성을 강조하지만, 의존적이고,
주체적이고 싶지만 늘 타인을 의식하며 사는 우리의 삶.
[소속감과 사랑받고 싶은 욕구]야 말로 매슬로우(Maslow)가 말한 욕구 중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제외하면 가장 기본적으로 동물과 인간을 구별 지어주는 사회적 욕구이자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기에,
누구나 내가 속한 조직 속에서 안전함을 보장받고 싶고 안정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또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쩌면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까지나 부모가 만들어주는 안전한 울타리에서 쏟아주는 맹목적인 사랑과 인정만으로 살 수가 없다.
아이들은 자라고,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결국 부모가 만들어준 울타리 밖 냉혹한 현실을 향해
한발 한 발 내딛는 발자국의 숫자에 비례하는 것 아니겠는가,
"엄마, 나는 잠들면 귀신이 잡아가도 모르나 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면~"
요즘 아이들은 부모세대가 다니던 학교생활과 너무 많은 것이 다르다. 학교에서 일과를 보내면서 쉬는 시간에 수근수근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각종 단톡방, SNS 등으로 일과 외의 시간에도 언제든 아이들은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날 학폭사건으로 친구들이 불려 갔던 쉬는 시간에 하필 꿀잠든 아기새가 한참이나 지나고야 알게 된 사건의 내막은 이러했다.
같은 반 여자아이들 몇 명이 다른 반의 한 친구에 대한 험담을 단톡방에서 여러 차례 또 다소 수위 높게 한 것 같고, 그걸 당사자가 알게 되어 학폭신고가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 단톡방에 있던 아이들이 한 명씩 선생님께 불려 가 조사?를 받고 다행히 사과를 하고 받아주면서 마무리는 되는 듯했다.
그러다 하필 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의 카톡을 확인하게 되었고, 문제의 단톡방 외에 여러 단톡방이 있는 걸 보게 되었는데, 그중 여자아이들 전원이 들어가 있는 단톡방을 보게 된 것이다. 반에서 여학생이 다해야 7명밖에 안되는데 (성비 완전 불균형) 그중 4명이 단톡방에서 수시로 선생님들 비난을 하거나 다른 친구 험담을 한 내용이 선생님께 그대로 발각된 것이다.
학폭사건과 별개로관련된 아이들이 선생님께 다시 또 불려 가 개별 면담을 하며 주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불똥이 엄한 곳으로 튀었다.
"우리 반 여자애들은 다 같이 친했는데, 그 애들이 어느 날부터 나랑 D랑 J한테 거리를 두는 거 같아. 막 자기들끼리 속닥속닥하는 것도 있고, 영화도 예전 같으면 일곱 명 다 같이 보러 가자고 했을 텐데 최근에 넷이서만 보러 갔더라고. 뭔가 형식적으로는 대화하고 문제없어 보이는데, 넷이서만 비밀이야기 하는 것 같고 예전 같지가 않아."
조금 더 상황을 캐물어보니 사실은 이러했다.
같은 반 여학생이 일곱 명, 모두 한 단톡방에 있었고,
넷은 험담에 가담했고, 셋은 동조하지 않았다.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이후 넷은 서운함을 이유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아기새에게 카톡을 좀 보여줄 수 있냐고 부탁해서 살짝 보니, 학기 초에 여학생들 7명 모두가 들어와 있던 단톡방이라 주로는 이 나이 소녀들의 관심사인 아이돌이나 쇼핑아이템, 인스타 릴스공유, 올리브영세일, (아주 가끔) 수행평가나 과제 관련 대화가 대부분이었지만
아니나다를까
중간중간 몇몇 아이들의 거칠고 예민한 표현들이 눈에 들어왔다. 담임선생님을 향한 말도 있고, 특정 다른 친구를 겨냥한 말도 있다. 어른들의 통제없는 그들만의 세계 속에 말투는 점점 거칠어졌고 수위도 높아졌다.
아기새를 못 믿었던 건 아니지만, 워낙 요즘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일 때 무서워지는 지라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은 떨리는 마음으로 설마, 혹시나, 만약에라도 내 아이가 그런 말을 먼저 주동한 적은 없나, 아님 동조했으면 어쩌지.. 조금 걱정되어 빠르게 벽 타기를 하며 확인했다.
휴.... 다행히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유치 찬란하게 마라탕이나 먹방 영상을 보며 먹고 싶다 하는 정도이고 그 성격 어디 못 간다고 엄마한테 보내는 답장처럼 "응""아니" 남자애들 같은 수식어라곤 없는 리액션.
안도의 한숨을 쉬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 네 명 친구들이 선생님이나 친구들 험담하고 욕해서 불려 간 후에 나머지 셋이랑 이제 안 친하게 지낸다고?"
"응, 넷이 따로 놀고, 쉬는 시간에도 속닥속닥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좀 신경 쓰이고 불편해"
"일단 그때 선생님이 말씀을 잘 못하신 것 같긴 해. 그냥 걔네가 잘못했음 걔네만 불러서 주의를 주면 되는데 종례시간에 모두 앞에서 비교는 왜 하셔가지고.."(이 말은 네 말이 맞다ㅜㅜ)
"D는 요즘에 학교에 거의 안 나오니까 이런 상황 눈치를 못 챈 거 같고, (예고 입시 실기준비로 학교에 거의 못 오고 있는 중), J랑 내가 걔네가 선생님한테 불려 갔을 때도 그렇고 선생님 험담할 때도 그렇고 이런 상황에서 걔네 편을 들어주거나 맞장구쳐주지 않아서 삐진 거 같기도 해"
뭐 예를 들면 어른들도 와이프가 옆집아줌마랑 싸우면 아무리 와이프가 잘못해도 남편은 와이프 편 들라는 말이 있잖아? 옆집아줌마 편들면 그날 쫓겨난다고?? 그리고 엄마도 어릴 때 이모랑 집에선 그렇게 싸웠는데도 밖에서 누가 이모한테 뭐라고 하면 이모가 잘했고 잘못했고를 떠나 양팔 걷어올리고 막 따지고 그랬다니까. 내 동생한테 왜 그러냐고. 유치하지만 내 동생, 우리 편이니까.
아마 네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엄마도 첫 반응은 우리 딸이 그럴 리가 없어요가 가장 본능적인 반응일 거야. 그러니 그 친구들의 입장에선 우리가 모두 친하고 너네도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맞아 맞아'동조해주지 않는 너희에게 서운했을 수도 있어.
그 험담 내용의 잘잘못을 떠나 사람의 감정이란 게 그래"
"아~~"
"근데 중요한 건 그 감정에 동조해 줄 수 없었던 이유야. 네가 생각했을 때 그 당시에 네가 그 친구들의 말에 '맞아 맞아' 동조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응 내가 다른 애들보다 핸드폰을 많이 하진 않으니까 실제로 못 보고 놓친 경우도 많고, 또 가끔 보더라도 어떤 건 내가 보기엔 선생님 말씀이 맞을 때도 있다고 생각했고, 특히 다른 애 험담을 할 땐 그 대상이 나랑 친한 친구이기도 해서 나는 그 친구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앞에서 대놓고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거든?이라고 할 수 없으니 그냥 카톡 못 본척하고, 늦게 본척하고 대답을 안 했지. 그리고 카톡이나 문자 같은 걸로 남의 이야기하면 절대 안 되거든?! 엄마가 가르쳐놓고선~?!"
"맞아. 네가 생각하는 기준에서 험담하던 친구들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으니까 동조하지 않은 거잖아. 근데 그걸 상대방이 서운해서 조금 멀어진 거고? 그럼 너는 반대로 그 친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 친구들 마음에 들기 위해 네가 동의할 수 없는 걸 '맞아 맞아'하고 동조하고 싶어?
"아니, 난 그러고 싶진 않아"
"그럼 현재는 어쩔 수 없어. 너는 네 가치관의 기준대로 판단했고, 그 결정의 결과를 보고 있는 거야.
옳지 않은 행동을 한 친구들에게 동조하지 않겠다고 판단을 해서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했지만, 그 친구들은 서운해서 거리를 두고, 그래서 넌 속상한 마음이 들지.
근데 만약 반대로 네가 이 친구들과의 우정이 맹목적으로 편을 들어줄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판단해서 네가 ‘맞아 맞아’ 동조해 줬더라면 당장 넌 이 친구들의 마음은 얻고, 지금의 어색함은 없을 수 있지만 네 양심은 조금 따갑고, 또 머지않아 후회할 수도 있지. 아니면 험담의 대상이 된 다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의 빚을 지게 되겠지.
그것 또한 어쩔 수 없거든.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으니까.
선생님께 불려 간 4명의 친구들 중에서도 주동해서 타인의 험담을 한 친구도 있겠지만 또 어떤 친구는 너처럼 마음속으론 이게 아닌데 싶어도 당장 곁에 있는 친구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친 친구도 있을지도 몰라"
"알긴 알지만 그래도 잘못한 게 없는데 친구들이 그러는 것도 좀 서운하고, 학교에선 뭔가 그런 소외감을 느끼면 좀 속상하고 그래"
"응 당연히 속상하지~ 엄마도 그럴 것 같아. 비슷한 경험도 해봤고"
"그런데 앞으로도 살면서 이제 그런 상황을 엄청 자주 경험하게 될 거야. 친구관계에서만 그렇겠어? 회사에서도, 또 동네에서도, 사람들이 모인 많은 곳에서 나와 타인의 생각과 가치관이 부딪히는 경우도 많을 것이고,
또 지금처럼 꼭 남이 아니라도 너 스스로의 마음속에서도 서로 다른 네가 싸우게 될지도 몰라.
나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지킬 것인가, 타인과의 관계나 융화를 우선시할 것인가, 또는 손해가 보이는 정직함을 선택할 것인가 부끄러움이 보이는 편한 길을 선택할 것인가과 같은 것들 말이야
사실 남의 눈치 안 보고 소신대로 한다는 게 어른들도 어려운 일이거든. 오죽하면 옛말에 나라님도 백성들의 눈치를 봤다고 하겠니"
"그리고 엄마도 마음은 100% 네 편이지만 이성적으로 또 너를 위해서 네가 서운하지만 냉정하게 너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야단치기도 하고, 다른 친구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때도 있었잖아? 너도 그 순간엔 엄마 미워하며 서운해했지만 엄마 본마음을 아니까, 너와 내 사이가 영영 멀어진 건 아니잖아? 아마 그 친구들도 조금 더 철이들 거나 조금 더 감정이 가라앉으면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고, 만약에 영영 그렇지 않다면 솔직히 꼭 유지해야 할 관계는 아니지 않을까?"
담배타임에서 남자 부서장들끼리 주고받는 꿀 정보가 은근히 있다는 걸 알지만, 노담인 나는 부서장급 회의의 휴식시간이나 회식시간엔 몇 안 되는 노담멤버와 머쓱한 시간을 보내야 할 때도 있고, 상사의 말도 안 되는 의견에 영혼 없이 맞장구를 쳐주고 돌아서며 밀려오는 현타를 직격탄으로 맞으며 씁쓸한 날도 있었고, 깍듯한 예의와 낯간지러운 딸랑이의 경계에서 나의 자존감과 자존심을 지켜내는 것이 눈앞의 이익 앞에서 휘청일 때도 있었고, 때론 비겁하게 끝내 자존심을 버리고 적당히 비위를 맞추는 '으른의' 사회생활도 해왔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사실은 아기새에게 이런저런 위로와 조언을 해주며 나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는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숨 가쁘게 살아내느라, 뒤쳐지기 싫은 조바심에 정작 지켜야 할 스스로의 신념과 용기를 잃고 있진 않았는가, 소속감이 주는 안정감이 불안해지는 게 싫어서, 어색하고 외로운 소외감이 두려워서, 두눈 질끈 감고 부끄러운 결정을 한 적은 없었던가.
나부터 되돌아보고 반성해 보고 다시 마음을 다짐해 보는 밤.
우리 해맑은 아기새도
그날의 고민과 한숨처럼
네가 어떤 딸이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니.
과연
온 가족 둘러앉아 외식하는 주말의 식당에서도 혼자 당당히 앉아 코다리찜을 먹고 오는,
보고 싶은 삼성 경기 표를 구하기 힘들면 혼자라도 가서 목 터지게 응원하고 오는 용감한 신여성 아니니!!
그렇게 용감하게 가다 보면,
그 소외를 견뎌내는 사람 곁엔 비슷한 보폭의 사람들이 서게 마련이라고,
반드시
그런 멋진 멋진 이들이 발맞춰 네 곁에 함께 하게 될 거라는 걸
인생의 선배인 엄마가 보증할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가 좋아하는 구절 남겨본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中>
덧)
오늘의 글은 집단행동이 때론 무서운 결과를 낳는 사춘기를 경험하는 우리 아이들이
왕따가 두려워 옳고 그름을 알면서도 무리에 끌려가는 안타까운 일들이 많기에
옳고 그름의 기준을 세우고 그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용기를 지니고 자라길 바라며,
어느 날 아기새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실제로 학교에선 소위 진짜 일진도 있지만, 소외되기 싫고 겉돌기 싫어서 그 무리에 들어가 마음 한 편에 죄책감을 가지지만 뿌리치지 못한 채 한순간 학폭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담배라던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대게 되는 친구들도 있는 것 같아요.
진짜 내가 원해서가 아니 친구들이 하니까, 친구가 하라고 하니까, 나만 안 하면 이상한 아이로 비칠까 봐.
그래서 부모 된 우리는 어쩌면 이거 해라, 이거 하지 마라 이전에
아이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토닥여주고, 위로해 주고, 응원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덧)
오늘 이야기 속 중3 아기새는 제법 의젓했지만,
지난 이야기의 중1 아기새 시절엔 학폭의 피해자가 되어 눈물콧물 쏟았던 날도 있어요.
다음엔 그 이야기를 풀어볼게요.
사춘기에 빠질 수 없는 매운맛.
다음 연재에서 말씀드리겠지만 요즘의 중학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정말 한 끗 차이이기도 하고,
애들이 더 무섭기도 합니다.
다음 이야기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