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따 당하는 여자
친절한 어른들의 언어로 바꾸자면
"엄마 엄마 나 집에 오는 길에 누가 핸드폰 번호 알려달라고 (호감을 표시)했어"
무슨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이찬혁이 멸종위기의 사랑을 그렇게 외치더니, 순애보는 다 어디로 갔나.
사춘기 아이들이 무슨 망설임과 기다림과 애타는 마음도 없이 번따로 처음 본 사람에게 호감을 표시한다니... 요즘 것들은 낭만이 없어... 사랑을 몰라......난 조선여자가 틀림없구나
아니, 그렇다 쳐도 그 꼴로 나갔는데?
학원 갈 땐 귀찮다고 화장도 안 하고 스님처럼 무지 흰 티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만 주구장창 입고 다니는 못난이에게 갑분 고백이라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엄마의 눈빛을 보며
아기새는 입술이 삐죽삐죽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딱 봐도 알 것 같다.
곧 쏟아내겠고만!!
뭔가 먹을걸 양볼에 가득 물고 있는 다람쥐처럼 당장이라도 뱉어낼 기세로 내 앞에 앉아
수다를 쏟아놓기 시작한다
"그래서 누구야? 너네 학교 친구?"
"아니 OO고 2학년이래"
(공부도 안 하고 고딩이...쯧 하는 꼰대 같은 생각이 스쳤으나 그래도 궁금한 건...)
"잘생겼어?"
"겠어?? 잘생겼음 내가 이러겠어??" (그거 참 안타깝네...)
"그래서 번호는 줬어?"
"아니, 번호주기는 좀 그렇다고 하니까 계속 말 시키면서 인스타 아이디라도 알려달라고 하길래 잘 안 쓰는 부계정 아이디 알려줬어. 안 그럼 계속 따라올까 봐"
못생겼다고 투덜대는 것치곤 표정은 설렘 가득, 목소리는 한 톤 업되어있는데??
아이의 특별한 하루가 너무 궁금하고 나까지 설레기도 하지만, 그래도 걱정도 되고, 조금 무섭기도 하기에 최대한 의연한 척 시크한 척 연기를 하며 대화를 이어 본다.
"아니 근데 밤이고, 무슨 일 있음 어쩌려고 그래. 그럴 땐 엄마한테 연락을 해야지!"
"OOO한테 연락했어. 그 상황에서 엄마한테 전화하긴 좀 그렇잖아."
OOO?
"그래서 OOO이 뭐랬는데??"
라는 내 질문에 둘이 나눈 DM을 보여주는데,
왜 늦게 다니냐, 학원 마치고 집에 바로 가야지 편의점엔 그 시간에 왜 가냐, 그 형 인스타 아이디 알려줘 봐라 내가 어떤지 찾아보겠다, 찾아보니 별로인 거 같다, 또 연락이 오면 차단해라, 아니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지 그랬냐...
고 녀석 참...ㅋ
아주 내용만 보면 남자 친구인데??
아기새는 OOO이 이렇게 진심으로 자길 걱정해 주고 챙겨주는 게 'so sweet' 하다며 허벌레 좋아죽는다.
아오.... 해파리 같이 투명한 저 마음..
웃프지만 과연 내 딸이 맞네 맞아!!
OOO은 아기새와 절친으로 지내다가 N번째로 좋아하게 된 같은 반 친구.
아기새가 그동안 며칠만 좋아하고 흐지부지 되는 일이 워낙 많아 누가누가 좋다고 내게 말한 건 셀 수가 없이 많이, 자주 바뀌기도 했고,
말은 내일이라도 모태솔로를 탈출하겠다 으름장을 놓지만 정작 고백을 받으면 눈이 높은건지, 겁이 많은건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길래
누구 좋다 그런 말 - 평소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친구에게는 좀 진심이라고 느껴졌던 것이,
내가 그렇게 좋음 고백이라도 해봐라 했더니,
사귀다 헤어지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게 싫다며, 자긴 평생 친구로 지낼 거라 했었지.
아고.. 눈물 난다 눈물 나 ㅋ
그 당시 나는 아기새를 놀리는데 재미가 붙어서
저녁마다 OOO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기새에게
오늘 저녁 방송, 띄워드릴 곡은
거미가 부릅니다 "친구라도 될걸 그랬어"
일기예보가 부릅니다 "인형의 꿈" 이런 말도 안 되는 개그를 하며 아기새를 놀렸는데,
정작 노래를 듣고는 이 노래 가사가 너무 슬프다며 눈물을 글썽이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OOO 아니던가. ㅋ
아무튼 낯선 형이 아기새에게 번호를 물어봤다고 하니, 급 버럭하며 잔소리를 쏟아내고 걱정을 하는 OOO도,
번호 따인게 설레는 게 아니라, 그 일을 계기로 OOO이랑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고, OOO이 자기에게 주는 관심에 애정을 느끼며 설레는 아기새도,
아무래도....
명절연휴 직전의 일이라 차 안에서도 그 이야기를 무한반복하고 있길래 할머니댁에 가서 이야기해도 되냐니 부끄럽다며 절대 안 된다고 그래놓고,
가자마자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이모부한테까지 재잘재잘 물어보지도 않은 번따오빠와와 흑기사 OOO사건을 한껏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그렇게 좋냐 딸아 ㅋ
사실 둘 사이, 관계의 결정적인 진전은 번따 오빠의 역할이 컸다.
[계기]
이렇게 예상치 못한 사건과 이벤트는 둘만 아는 이야기가 되어
너와 나를 조금 더 가깝게 조금 더 특별하게 '우리'로 만들어준다.
이 끝에 선 나와 저 끝에선 너를 퐁당퐁당 이어주는 디딤돌처럼,
번따오빠는 본의 아니게 둘 사이 오작교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번 그린라이트의 일등공신은 명절연휴, 절묘한 타이밍 아니었을까.
[타이밍]
평소 학업과 스케줄로 타이트한데 때마침 중간고사가 끝나 마음도 가볍고,
게다가 몇십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재량휴업을 포함하면 장장 열흘간의 연휴.
덕분에 너그러워진 분위기 속에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시도 때도 없이 새벽까지 손가락으론 부지런히 대화하면서, 입꼬리를 수시로 씰룩거리며
동시에 엄마는 원하지도 않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옆에서 생방송 중계를 해주는 아기새.
완전 나이스타이밍이잖아?!!!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린라이트는 이게 없었음 소용없었지.
둘의 가슴속에 꽃씨처럼 묻혀있던, 몽글몽글한
[마음]
애나 어른이나, 예나 지금이나 역시 '질투는 나의 힘'
갑작스러운 번따오빠의 등장으로 그간 머뭇머뭇했던 OOO은 아기새에게 좀 더 신경을 쓰게 되었고,
아기새는 안 그런 척 하지만 (아니 사실은 완전 티나..) 그 관심이 설레고 좋기만 하다.
간질간질~ 가을의 문턱에서 봄의 설렘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될 줄이야!!! (아오, 눈꼴사나워!! )
시작도 하기 전에 나중에 헤어져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까
두려워 글썽이는 조심스러운 마음도,
그 친구를 떠올리며 유난히 반짝이는 너의 눈빛도,
한 톤 올라간 너의 웃음소리도, 그 친구 이야기를 하며 종종 발그레해지는 두 뺨도,
막상 그런 너를 보고 나면
공부해라 잔소리가 목구멍, 아니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가 쏙 들어간다.
어찌나 설레고 신나 보이는지.
청춘, 그래서 옛 어른들이 굳이 이 앞에 한마디 덧붙여 '이팔청춘'이라 불렀구나.
16세 언저리, 바야흐로 첫사랑의 계절.
예쁘고 예쁘네
나도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그 옛 시절, 잦아진 약속이나,
나가기 전, 드라마처럼 옷을 고르고 거울 앞에 한참을 붙어있는 모습,
무선 집전화기를 방에 들고 가 문 닫고 전화기가 뜨거워지게 통화하던 모습...
모두가 첫사랑의 계절을 알리는 신호였고, 우리 부모님도 모르지 않으셨겠지.
모르는 척하셨을 뿐, 자기 전 나란히 누워 "우리 레모니가 벌써 다 커서 연애를 하네"라는 대화를 하시고
한편으론 걱정이 되어 빨리빨리 다녀라 통금시간을 정해두시고,
바지가 조금이라도 짧으면 잔소리를 하셨겠지.
딸아,
엄마라고 없었겠니, 모르겠니
한참 설익은 나이의 사랑도
한참 익어가는 나이의 사랑도
사랑이란 건
설렘으로 떨림으로 밤을 설치게 하기도 하지만
그리움으로 애틋함으로 뜬 눈을 지새우게 한다는 걸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속수무책인 마음. 엄마도 잘 알지.
내가 나의 경험으로 한눈에 아기새의 마음을 알아보듯
우리 부모님도 당신들의 연륜으로
나의 설렘도, 나의 이별도 지켜보시고, 알아보셨겠지
그저 소리 없이 지켜봐 주셨던 부모님의 마음
그 바통을 이어받아,
나는 나의 방식으로 내 딸을 응원해 본다.
기침, 가난, 사랑 세상에서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중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아니 어쩌면 누구나 피하고 싶지 않은,
오히려 제대로 맞닥뜨리고 싶은 그놈의 사랑 ㅎㅎ
아기새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마음이 아무리 설레고 간절하여도 계기가 없거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흘려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인연도 있고,
때론 마음이 별로 없었는데 특별한 계기나 절묘한 타이밍이
둘 사이를 단단히 묶어주는 인연도 있다는 걸.
그리고 아무리 생각하고, 의지를 불태워도
공부나 일처럼 계획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니, 어쩌면 보란 듯이 일부러
나를 엉뚱한 운명 속에 빠뜨려 놓곤 하는
그래서 실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과의 관계, 특히 사랑이라는 걸
얼마나 수많은 인연을 흘려보내고, 후회도 해보고, 그리워도 해보며
한숨과 눈물의 대가로 겨우겨우 알게 될까.
그래도 부디
망설이거나 두려워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후회라는 건
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나, 최선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
그리고 재고 따지느라 순수하지 못했던 마음이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헤어져도, 남이 되었어도
그렇게 제대로 했던 사랑은
언제까지고 가슴속에서 반짝이지 않았던가.
아기새가 엄마의 이혼을 지켜보며 행여나
이별이 두려워 캄캄한 마음으로 고독을 선택하지 않길,
사랑도 정직하게, 성실하게,
그래서 마음에 반짝이는 추억이 많았으면.
그래서 곱게 사랑했던 따뜻한 기억이 폭삭한 이불처럼 너의 마음을 감싸주길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또 떠나고, 떠나보내보며
그 어느 날 반짝이는 마음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마음 속 변함없는 너만의 북극성이 되어줄 누군가를
운명으로 인연으로
알아보고, 아끼며, 사랑하길
그래서 특별히 오늘 저녁식탁의 선곡은
여행스케치 "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어" 띄워봅니다 :)
두렵고 조심스럽지만, 설레고 벅찬 사랑을 응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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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감성파괴. ㅋ
덧)
원래 10월엔 조금 예민하고 아플 수 있는
하지만 피해 갈 수 없는 사춘기 - 학교 안의 갈등이나 학폭 같은 이야기를
매운맛으로 먼저 풀어보려고 했는데 딱 연휴 전에 이 사건이 있었지 뭡니까.
이건 안쓸 수가 없잖아요
요즘 제가 잔소리를 해도 나사가 살짝 느슨해진 듯 연신 입이 귀에 걸린 아기새 근황이었습니다 ㅎ
덧)
아기새 이야기 듣고 또 막 가을 타서, 설렘지수 한껏 올라서
누가 번호 물어보면 덥석 알려주고 그러지 마세요
우리 나이엔,,,200% 보이스피싱이나 다단계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