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시간 앞에서 살뜰하게

아기새와 D-30

by 레몬트리

집으로는 오는 택배박스가 눈에 띄게 늘었고, 서재방 구석엔 짐들이 하나둘씩 쌓여간다...

D-30

아기새가 집을 떠날 날이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합격 소식을 듣고 안도와 기쁨을 함께 느꼈던 것도 잠시,

이후론 종종, 아니 자주 아기새가 낯설고 치열한 그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동시에 아기새가 없는 집에 혼자 남겨질 나 자신을 생각하니 조금의 우울감이

꽉 짜인 시간표대로 살아온 나 자신을 수시로 흔들어댔다.


물론 서로를 귀히 여기며 즐겁게 지낸 우리 모녀이지만,

지난 2년간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사춘기 앞에서 무너지고 매일 전쟁을 치렀던 게 사실이다.

"꼭 잘돼서 제발 가버려라"하면 "응, 꼭 갈 거야" 하는 결코 한마디도 지지 않는 아기새와 티격태격 매일 씨름하며 옛 어른들이 복장이 터진다는 게 이런 마음이었구나, 그래서 예전에 우리 엄마가 나를 보고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 그러셨구나 새삼 실감하는 시간이었달까.


그런데 이제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한 달도 남지 않으니 모든 게 애틋하다.

생선도 혼자 발라본 적이 없어 늘 발라주는 살코기만 참새새끼처럼 넙죽넙죽 받아먹었고,

양말은 수백 번을 이야기해도 안돼서 여전히 뒤집어 돌돌 말아 내놓는데,

어휴, 또 멋 부리는 건 좋아해서 곧 죽어도 흰색 옷을 좋아하지만 털털해서 금방 팔목이 까만

내 눈엔 여전한 아기인데 너를 어떻게 보내냐..



군입대를 앞두고 영장을 받은 아들을 보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시집가는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게 이런 기분일까.



그렇게 생각을 하니 지난 2년 그렇게 말로 치고받고 하던 일들이 왜 그랬나 싶을 만큼 무안하게 다 이해되고 너그럽고, 귀엽고, 그저 예쁘다.



너그러워진다.

흘리고 먹는 밥알도, 말을 하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씹다 만 밥알도, 그 밥알을 밟아서 발바닥이 떡이 되어있는 양말도, 곧 그리워질 모습이겠지. 식탁 아래가 깨끗해지고, 빨래 바구니에 더 이상 돌돌 말린 양말을 보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속이 시원하기보단 한쪽이 허전하고 아려온다.

그렇게 너그러워진다.



애틋해진다.

다들 중요하다는 중3 겨울방학인데, 뒤집어 배를 깔고 침대에서 손이 노래지게 귤을 까먹으며 흥얼대는 너를 보면 불과 한두 달 전만 해도 숙제는 했느냐, 공부는 안 하냐, 씻고 올라간 거냐 잔소리가 한 바가 지였을 텐데

들어가면 이제 정말 대입이라는 전쟁 속을 엄마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구나 싶으니 괜히 안쓰럽고

지금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어진다.

그렇게 애틋해진다.



아낌없어진다.

먹지 말라고 잔소리 해대던 불닭볶음면도, 학원 가기 전이나 다녀와서 툭! 소리를 내며 빨대를 꽂고 쪽쪽대며 수다를 떨던 초코우유 바나나우유도, 엄마가 더 큰 건지, 더 많이 먹는 건 아닌지 얄밉게 욕심내던 딸기도 올 겨울엔 떨어지기가 무섭게 쟁여놓고 하나라도 더 먹는 모습을 보고 싶어 진다.

그렇게 아낌없어진다.



우리는

시간의

유한함 앞에서 너그러워진다

유한함 앞에서 애틋해진다.

유한함 앞에서 아낌없어진다

유한함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그제야 마음의 크기를 알게 된다.



우리는

사실은

영~ 반대로

유한함을 인지하지 못해서

상대에게도, 내게도 너무 엄격했고

유한함을 인지하지 못해서

다음을 기약하다 후회를 남기기도 했으며.

유한함을 인지하지 못해서

표현하지도 못한 채 피우지 못한 감정이 응어리가 되기도 했다.



이 마음이 영원할 것 같고,

이 시간이 아니라도 다음이 있을 것 같았고,

이 끝은 언젠간 오겠지만 아직은 멀었다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무심했고, 소홀했고, 미뤘고, 모르는 척도 했다.


유한함을 마주해 보니,

모든 것이 유한한 것인데

몰랐구나, 모르고 싶었구나, 모르는 척했구나 하는 마음에

조금은 부끄러워지고, 미안해지고, 후회도 된다.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모든 시간, 인연, 사건들에게.



아기새를 보내는 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님을 알지만

생각과 마음은 늘 그렇듯 따로 놀아서

서재방 한쪽에 아기새가 챙겨갈 물건들이 이삿짐처럼 쌓이는 걸 보니

이 밤도 아쉽고, 이 순간도 돌아서서 그립다.


비단 아기새와만 그랬던 건 아니겠지.

언제나 내 품에 내 새끼일 것 같은 아기새가 이렇게 훨훨 날갯짓하고 둥지를 떠나듯


우리는 유한함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며

후회하고, 아쉬워하고, 또 아파하기도 하며

조금씩 익어가고 깊어진다.

영원할 줄 알았지만 어느새 마침표를 찍은 사랑도.

굳건할 줄 알았지만 점점 희미해진 우정도.

늘 함께일 줄 알았지만 결국 뒤를 보인 인연도.


눈물, 콧물, 짠맛, 쓴맛 다 뒤엉킨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더욱 익어가고 깊은 맛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며칠 전 엄마가 예전에 내가 보내준 동영상이라며 7년 전쯤의 영상을 보내줬는데,

단지 앞 공원에서 흙길을 밟으며 아기새와 산책하던 영상이었다.

참 신기한 게

영상을 보자마자 그날 발 끝에서 나던 사각거리던 모래 소리와 초저녁의 미지근했던 공기

쫑알쫑알 떠들던 너의 목소리마저 귓가에 코끝에, 눈에 선한데

그때의 아기새만 다 자라 버린 것 같았다.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고,

아무도 모를 우리의 유한한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배터리처럼 속절없이 흐르고 달리고 있지만,

비록 언제가 그 끝임은 알 수 없어도,

다행히 이제 끝이 있다는 것만큼은 아는 나이는 되었으니,



모든 순간 후회 없이,

모든 순간 정성껏,

모든 순간 진실하게,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 어느 날 마주할

마침표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덧)

오늘도 제 인생의 스승은 누구도 아닌 아기새였네요 ^^

이런 사연으로 요즘 두문불출했습니다

짐도 싸고, 마음도 준비를 하고 있어요

어디 전쟁 가는 것도 아니고, 이민 보내는 것도 아닌데 학교 앞에서 글썽이지 않으려면

마음 단단히 준비해야겠어요


뭐,, 물론 아기새는 아직 그 '유한함'을 이해할 나이가 아니니까요.

마냥 설레고 신이 났습니다.

1월도 모두 고생하셨어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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