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nA Dec 04. 2017

비가 그치고 다시 파란 날 아래

어디까지 왔나, 얼마나 남았나.

밤새 내린 비가 아침까지도 흐린 날씨를 만든다. 나름 숙소는 알차게 구성되어있다. 공동 샤워실도 아니고 우유에 설탕 가득 밥알 넣고 끓인 아침밥도 공짜다. 하늘은 흐린데 해는 쨍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수선스럽게 짐 정리를 한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젖었던 지라 신발은 여전히 축축하다. 선풍기를 열심히 돌린 탓에 다행히 바지는 빳빳하게 말랐다.  우리가 도착한 이후에도 두 대의 바이크가 더 주차되었는데 아침밥을 먹고 나자 우리와 비슷하게 여행 준비를 마치고 내려온 라이더 둘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오프로드 용의 KTM 바이크는 거친 여행을 알려주듯 여기저기 덧댄 흔적이 있다. 캠핑장비가 잔뜩 올려진 바이크는 흙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안녕! 어디로 가니?

안녕! 어디서 왔니?

그들의 영어는 짧고 길게 의사소통을 나누기에는 우리 모두 가야 할 길이 구만리이다. 어제의 빗길 주행의 여파가 오늘까지도 이어진다. 비가 와서 거북이 주행을 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2시간이나 늦어졌고 깜깜해진 후에야 숙소에 도착했다. 오늘만은 해가 떠있을 때 숙소에 도착하고 싶다. 결국 그들이 가는 길이 네비와 다르다는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빠르게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리곤 막다른 길에 가서 그 친구들의 충고를 어깨너머로 넘겨버린 것을 후회했다.

한국에서 같이 바이크 여행을 왔던 친구들을 이르쿠츠크에서 만났었다. 다들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넘어간다 하는데 우리는 그 거리를 바이크로 건너간다. 대부분이 3달에서 6달 정도의 긴 여행을 계획하고 왔단다. 우리보다 2주 먼저 출발했음에도 같은 지역에서 만났으니 우리는 그들보다 엄청나게 빠른 라이딩을 하고 있는 셈이다. 기차로 떠난 그들은 우리보다 모스크바에 적어도 일주일은 먼저 도착할 것이다.  어차피 목표는 여행이다. 그리고 라이더에게 그 여행은 각자의 선택과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횡단 열차도 한번쯤은 경험해 보고 싶은 훌륭한 여행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쭈욱 매일을 달리는 것도 또 다른 여행이다. 숙소에서 만난 그 친구들은 도로가 아닌 오프로드를 달린다. 그 역시 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여행에 대해 끓임 없이 이야기한다. 어느 나라를 가면 무엇을 봐야 하고 어떤 운송수단을 써야 하고 이것은 꼭 먹어야 한단다. 그런데 많은 정보들이 범람할수록 봐야 할 것들, 들러야 하는 장소들, 먹어야 하고 만나야 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정보의 범람은 여행의 중심을 내가 아닌 타인의 경험으로 옮겨놓는다.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것은 그저 단 하나이다. 다치지 않고 오늘도 어제만큼, 그리고 내일도 오늘만큼 시동을 걸고 바이크 위에 앉아 달린다. 도로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 봤던 러시아는 또 다른 풍경을 우리에게 내어준다. 참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달릴만하다. 아니, 이제는 달릴만하다. 제법 라이더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어제 내린 빗물이 바이크 곳에 흙먼지를 선물했다. 처음 무언가를 갖게 되면 애지중지한다. 아침에 일어나 바이크를 쳐다보며 흐뭇하였던 날들이 있었다. 넘어지면 큰일이라도 날까 싶어 매번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속도를 냈다. 그래서 실력이 천천히 늘었을지도 모른다. 넘어지며 혹시라도 뭔가가 잘못되까 봐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으니까. 그러다  동해항으로 가던 출발일에 아주 크게 제꿍을 했다. 여러모로 가장 큰 제꿍이었다. 배웅하던 이들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고 한동안 나의 손은 덜덜거렸다. 크게 넘어진 건 아니지만 자신 있게 출발했던 만큼 자존심에도 그리고 출발 직전 설레었던 마음에도 상처가 컸다. 덜컥 여행을 떠난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그러나 끓임 없이 담배를 피워대던 짝꿍의 얼굴을 본 순간, 내가 여기서 얼어붙었다간 저 이는 내 걱정에 여행의 시작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 극복할 만한 별일 아닌 일이었으나 많은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여행의 중반을 향해 달리는 오늘, 다시금 달라진 나의 위상을 확인한다. 제꿍에도 가슴을 벌렁거렸던 나는 이제 바이크 위가 제법 편안하다. 어깨에 힘을 빼고 아랫배와 엉덩이를 최대한 바이크에 밀착시키며 달리고자 하는 방향으로 상체를 움직인다. 겁이 없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자연스럽게 바이크와 한 몸을 이루려면 굳은 몸을 풀어내야 한다. 비를 맞고, 바람을 견디는 러시아의 라이딩은 더러워진 바이크만큼이나 원숙한 나를 만들었다. 가야 할 길, 남은 길 위에서 아마도 더 나아지리라.

일하듯이 달리고 있다. 야근하듯이 늦은 저녁을 달린다. 이러니 당연히 나는 성장할 수밖에 없다. 얼마만인가.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것이. 특별한 목표 없이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이. 우리는 항상 목표를 세워놓고 달린다. 얻어걸린, 우연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어디까지 언제까지 해야 하는 마감 앞에 쫓긴다. 갚아야 하는 원금과 이자가 빚쟁이 월급쟁이로 만들고 올라가야 지위와 남들의 시선이 경쟁하는 직장인으로 만든다. 쫓기는 삶에는 가끔 멈춰 섬은 사치이다.

지금 나는 그 무엇에도 쫓기지 않는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러나 결코 달려야 하는 절대치에 속박당하는 느낌이 아니다. 하루하루 그저 달린다. 가끔 멈춰서 바라본 풍경도 아름답지만 달리며 보는 풍경은 배 이상으로 아름답다. 누군가는 무리인 일정에 그 좋은 여행을 천천히 하지 그랬냐고 말할 수도 있다. 달려보면 안다. 적당한 속도로 사라지는 러시아의 풍경과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마주할 때, 현실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환상 속을 달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바이크로 여행하는 자만이 알 수 있는 매력이다.

낮은 언덕들이 하늘에 뜬 구름만큼이나 몽실몽실하다. 매번 바이크의 시동을 끄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느낀다. 여긴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 언제까지 달릴 것인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현실이 꿈같다. 언제 한번 이렇게 살아볼까.

회사를 그만둘 때, 많은 이들이 고민에 고민을 하는 동안 나는 우스갯소리 몇 번 정도만 했다. 에잇, 그만둬버릴까. 하하하. 누군가에게 홀리듯 희망퇴직을 신청할 때 많은 이들이 놀랐다. 꿈같은 이야기는 사실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가장 멀고 어려운 여행을 시작하며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면 시작은 익숙했던 곳을 벗어나는 것부터였다. 한껏 움켜쥐고 있었던 좋은 직장, 보통의 삶을 내려놓으면서부터였다.

꿈을 꾸는가. 현실을 꾸는가.

회사를 다니며 내가 살고 싶던 삶은 이게 아니지만 다들 그렇게 산다며 다독였다. 내가 꾸는 꿈에 대해 한탄하며 포털사이트에 걸린 남들의 여행에 군침을 흘렸다. 꿈을 꾸면 현실은 참을 만하다. 조만간 나는 이 곳을 탈출할 거라고 매번 약속한다. 그리고 그 약속이 매번 깨져도 다음을 기약하며 참아낸다. 왜냐하면 꿈이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는 다르다. 현실이 꿈이다. 이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꿈꾸는 건 언젠가는 이뤄지도록 하겠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현실과 괴리된 꿈은 환상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그랬고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꾸는 꿈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것도 남들의 현실을 빌려서 만든 환상이다. 

지금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 떠나겠는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변하겠는가. 바이크에 올라타며 생겼던 두려움을 극복하는 꿈을 꾸다가 결국 여기까지 왔다. 지금 이 순간이 꿈같이 느껴진다. 고백하건대 회사를 다니며 단 한 번도 그 시간을 꿈같다 느껴본 적이 없었다.

 

흐리던 어제의 날씨 탓에 계속 하늘을 주시했는데 절반을 넘기자 날이 밝아진다.  주유를 하며 앞서 달리던 라이더와 계속해서 만난다.  이번엔 휴게소에서 만났다. 목표로 하는 도시가 같은 모양이다. 주유를 하고 화장실을 갔다 오는 사이 인사를 나눈다. 얼굴이 낯이 익다.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안에서 스쳤던 일본인이다. 그 친구도 횡단을 하고 있나 보다. 반갑게 서로 인사를 하고 일정을 묻는다. 우리보다 더 멀리 가는 게 목표란다. 동양인 셋이 인사를 나누고 있자 휴게소 안의 러시아 친구들이 우르르 나온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엄지 척을 하고 마지막은 사진을 찍는다. 젊은 친구들은 여행자인 우리와 달리 현지 바이커 복장이다. 비를 맞고 벌레에 찌든 우리의 옷에서는 황무지 냄새가 난다. 여행자와 현지인은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티가 난다.

왁자지껄하게 인사를 나누고 얼른 먼저 바이크에 시동을 건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남아있다. 하늘이 맑아졌다. 이 기회에 더 멀리 더 빨리 앞으로 나가야 한다. 하루에  세 번 정도 주유하는데 오늘처럼 많은 라이더를 만나는 날이 많지는 않다. 다른 한 주유소에서는 벨라루스에서 온 바이커를 만난다. 낡고 먼지가 가득한 바이커지만 그와 무척 잘 어울렸다. 얘기하고 싶은 게 많은지 좀처럼 아쉬움을 떨쳐내질 못한다. 그의 반가운 눈빛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길에서 만난 낯선 이가 이토록 반가운 이유는 단 하나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여행을 진정으로 존중하기 때문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에 힘들고 어려운 여행을 선택했다는 것, 그것도 바이크와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라이더라면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꿈같은 일이다. 각자의 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쉽게 떠날 수 없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를 보는 라이더들은 그 큰 결심에 박수를 보내고 안전을 기원해준다. 그리고 안전한 여행을 마친다면 모두에게 우리처럼 언젠가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게 된다.

달리다 보면 문득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꿈같은 여행이 별거 아닌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왜냐하면 내겐 이미 현실이 돼버렸기에, 꿈을 이뤘기에 뭔가 허전하다. 그 헛헛한 마음에 여행의 순간을 포개어 집어넣는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을 잊지 않기 위해 약속을 한다. 분명 돌아간 한국의 삶도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나는 더 자유롭고 용감해질 것이다. 그러려면 매일 안전하고 즐거운 이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돌아가는 문 앞에 서는 그날까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규모가 작은 도시인데 도로도 넓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도 있다. 경전철이 다니는 도로에는 바쁜 퇴근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이다. 우리의 숙소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현대적인 호텔이다. 그들에겐 매우 비싼 금액의 하룻밤이다. 긴 여행을 계획한 우리에게도 그리 가벼운 가격은 아니다. 그러나 잠만은 푹 자고 싶었다. 이 금액이 쌓여갈수록 유럽에서의 경비의 압박이 심해질 것을 알고 있었다. 짝꿍은 매번 호텔에 관대하게 말한다. 어디든 상관없노라고. 그러나 여간해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 말 한마디에 신경이 쓰인다. 예약은 오로지 나의 몫이므로, 결국 오늘도 가격이냐, 편안함이냐를 저울질하다 이도 저도 만족시키지 않는 애매한 숙소가 아닌 좋은 숙소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오랜만에 몸이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해결하러 가는 길이다. 숙소 옆에는 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공원 양 옆에는 주거 단지가 나란하게 세워져 있다. 아이들과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그들의 일상에 난데없이 들어온 이방인이 된 느낌이다. 식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그저 서울시 마포구의 어느 동네에서 처럼 손을 잡고 걸어가다 보니 이방인이 아니라 여기가 나의 일상이 된 듯하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을 포기했기에 가능했던 여행이다. 힘들게 그와 결혼을 했기에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했다. 부모님이 나를 포기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만큼 나의 결정을 존중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모님에게서 완벽하게 독립된 어른으로 인정받았다.  아직 우리는 아이 때문에 포기하는 일도 없다. 그렇다. 사랑하는 가족은 다르게 말하면 족쇄가 된다. 아이를 갖게 되면 완벽한 행복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본 부모는 많은 것을 희생한다. 우리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돈을 벌어야 하고 각자의 꿈을 꾸지 않아야 하고  아이의 꿈을 걱정한다. 분명 아름다운 선택이다. 가정을 만들고 견고한 울타리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그 울타리를 만들고 나보다는 아이와 가정을 더 생각하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우리 둘 뿐이라서 좋다. 아이를 가지기 전, 회사를 다니지 않고 오로지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찾아 헤맬 수 있어서 좋다. 어느 순간 자신을 위해 살다가도 가족이 생기면 더 소중한 것이 나를 누르기 마련이다. 그전에 마음껏 나를 위할 수 있어서 좋다.


매일 달리기만 해서 좋다. 아무것도 강제된 것 없이 내 마음대로 기다리고 멈추고 또다시 기다린다. 머릿속에 들어왔던 생각들과 기억들도 제 멋대로 춤을 춘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마음껏 나만을 위해 누릴 수 있는 날이.


조용히 저물어가는 어느 러시아의 도시, 라이딩이 가져다준 노곤함에 몸이 조금씩 무너진다. 오늘 하루도 즐거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리며 하는 별별 생각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