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 동서사이.. 결코 가깝지 않은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그녀, 우리 동서
10년 만에 다시 취업을 해보고자 고군분투인 요즘. 오래전부터 나의 라이벌이자 애증의 관계인 그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경력단절인 지난 10년간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거든요.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약 12년전입니다.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에 교육자라는 커리어까지. 익히 들어왔던 그녀의 스펙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녀는 초면인 제 눈에도 참 매력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더 초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저의... 미래 아랫동서가 될지도 모를 인물이었거든요. 네, 우리의 첫 만남은 P 씨 가문 형제들의 약혼녀(?) 자격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시에 남편 동생 커플은 이미 양가 어른들 허락으로 결혼 날까지 받아둔 공인된 사이였고 저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결혼은 향후 2년 정도 후에나 계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가족으로 묶이기에도 그렇다고 생판 남이라고 여기기에도 애매했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3살 연하. 사랑스러운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저를 배려해 줬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자리에 있는 저로서는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시간은 흘러 2년 뒤 계획대로 저도 결혼에 성공하자 우리는 공식적인 가족관계가 됩니다. 동서라는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관계로... 생각보다 우리 둘은 비교도 많이 됐습니다. 서글서글하고 특히 어른들에게 잘하는 그녀는 그야말로 (제눈에는) 우리 가족의 주인공과 같았습니다. 세상 엄하신 시아버님도 그녀의 말 한마디에는 세상 다 가지신 것처럼 웃으시더라고요.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건강한 사내아이도 낳았습니다.
전 사사건건 그녀와는 달랐습니다. 낯을 심하게 가리고 큰 용건이 없으면 시댁 어른들과는 일체 연락도 안 했거든요. 활동적인 그녀와는 달리 저는 임신으로 직장을 관두고 소일거리 하는 시간들이 보람 있고 즐겁더라고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자꾸 모든 게 모든 상황이 나에게만 불리하다는 생각, 나만 미움받는다는 생각... 줄여서 자격지심이요.
그녀는 첫째 아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자꾸, 일을 벌이고 또 접고 또 벌이고... 또 언젠가부터는 공부를 시작하겠노라 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맏며느리 놀이에 최고조로 심취해 있을 때였습니다.
"형님,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그래서 대학원엘 진학해 볼까 하고요. "
"응.... 근데 그거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나..?
"그러니까 형님이 저 좀 도와주셔야 해요~ 제사라든지 행사라든지 그런 거요"
".....?"
평소처럼 농담 던진 해맑은 얼굴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러니까 본인 자기 계발에 날 갈아 넣어달라 이건가...?
동서는 결국 무수한 시행착오를 뒤로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미술 선생님으로의 첫 발자국을 뗴고야 말았습니다.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교로 진학을 했고요, 시댁 행사 때마다 책을 한 더미씩 들고 들어오며 난처한 얼굴로, '학교가 늦게 마쳐서'라는 묻지도 않는 한마디를 하며 들어오더라고요.
시댁의 제사는 춘하추동 계절별로 한 번 꼴로 있어 힘든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 며칠 전에는 남편조차 제 눈치를 볼 정도로 저는 예민해졌습니다. 꿈을 이루고자 고군분투 중인 동서를 정면으로 마주 볼 기분이 아니었달까요. 한 해, 두 해... 홀로 행사를 치르거나 맡아야 할 일이 늘어날 때쯤 저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동서, 미안한데 나도 하고 싶은 일 많고 해야 될 일 많아. 나도 바보라서 제사마다 빠지지 않고 일하는 거 아니야. 동서 때문에 애아빠랑도 매번 싸워. 이건 아니지."
몇 번 고성이 오가고 우리는 그렇게 처음으로 속내를 드러내며 크게 싸웠습니다. 그리곤 서로를 보고도 모른 척했습니다. 여러 가족들이 힘들어했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는 더 얼어붙어갔습니다.
겨우 다시 관계가 회복된 것은 참 뜻밖의 일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나이로 마흔이 되던 해 첫날 친정 엄마와 우연히 새해 인사를 하던 중, 집만 지키며 시간을 보내던 제가 안타까워서인지 '다시 공부를 시작해 보라'는 엄마 제안에 결혼 후 처음으로 저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애들 키우면서는 꿈을 다시 찾기보다는 아이들이나 남편 꿈에 합승할 궁리만 했었는데요. 당시 저는 절박했습니다. 제 오랜 친구들은 거의가 아직도 직업전선 최전방에서 수많은 후배들을 거느리며 롤모델이 될 정도로 성장해 있고 아이들 친구 엄마들 여럿도 어엿한 자기 가게를 운영 중인 사장님이었어요. 출발선은 다 고만고만했을 텐데 애 키우고 살림 사느라 남들만큼 노력 안 하고 모른 척 산 인생은 이미 너무 늦은 듯 보였거든요. 남들은 점차 치열하게 30대를 보내고 자리 잡기 시작한 40대인데 난 정말이지 아무것도,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형님, 혹시 단호박 케이크 주문도 받으시나요? 저 그게 너무 먹고 싶은데요~"
참 해맑은 여성입니다... 동서는 며칠 전 아버님 생신 때 제가 구워간 단호박 갸또 케이크가 맘에 들었는지 그걸 또 해달라는 겁니다. 헛웃음이 났습니다. 날 멕이나..?
생전 연락 한 번이 없더니 난데없는 케이크 타령에 말문이 막혔지만 뭐 못할 것도 없죠. 남편 은퇴하게 되면 소소하게 작은 카페를 열려고 저는 종종 베이킹을 배웠고 실습했었습니다. 그래... 연습 한 번 더 하는 셈 치고 케이크를 구웠습니다. 굴러다니는 상자에도 넣었습니다. 핸드메이드 스티커도 붙였습니다. 동서는 고맙게 받아 들었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 알람소리에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형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많이 부족한 금액인 건 알지만 제가 주문했으니 케이크값을 보냅니다. 너무 감사드려요. 그동안 형님의 수고도 감사하고요. 그리고 형님, 너무 맛있는데 진짜 어떻게 판매 안될까요? 형님은 베이킹에 재능이 있으세요. 응원하고 싶어요.' 대략 이런 내용의 메시지에 현금을 이렇게...
결혼하고서 처음으로 제 노동의 대가를 받았어요. 그런데 사실 돈보다도 제 케이크를 먹고서 진심으로 맛을 평가해 주고 응원해 준 동서가 사무치게 고마웠어요. 그리고는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동서가 아이 둘을 내리 낳으면서도 꿈을 향해 어떻게든 배워보고 알아보고 노력할 때 동서를 진심으로 응원해주진 못했습니다. 그녀도 참 절박했을 텐데. 사실 누구의 응원 없이 본인 의지로만 밀고 나간 일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일입니다. 그러니 더 기특하죠. 동서는 일을 하며 돈을 벌어 학비하고 그 와중에 아들 둘도 키워내고 종종 친정에서 하시는 가게도 도우러 가요. 유일하게 쉬는 날에요. 그렇게 얄밉던 동서가 갑자기 슈퍼우먼으로 보이는 건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구직을 해보니 더 절절히 와닿습니다.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건 없다는 것을요. 그 길을 누구의 배려 하나 없이 묵묵히 버티고 헤쳐나아 간 그녀. 저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조금은 쉽게 걷게 되었음을 이제는 인정합니다. 누군가가 닦아놓은 길을 걷는 것은 처음 시작을 한 이에게 쏟아지는 관심, 혹은 야유로부터도 얼마간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이제는 압니다. 우리 동서 참 대단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우리 열심히 해보자고!! 나도 동서의 든든한 스폰서가 돼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