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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의삶을지원 Mar 27. 2023

10년 만의 이력서, 그리고 꿈.

 아이 둘이 초등학교 생활도 제법 적응했고 저도 살림이 손에 익어 남편 출근하고 아이들 등교하면 살림도 후딱 하고 커피 한잔 하며 아침 뉴스 보는 삶이 이래서 좋구나 느낄 때였습니다.  변함없이 잘 될 것 같던 남편 일도 휘청이고 아이들은 커갈수록 필요한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는 있지도 않았던 휴대폰은 이제 아이들에겐 필수품이 된 시대랍니다, 저희 큰아이 왈.

 

 저는 결혼생활 중 4년여의 기억은 뚜렷하질 않습니다. 연년생 아이들을 임신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며 가장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혹자가 그러더라고요. 우리 뇌는 기특하게도, 너무나 힘들 땐 잠시 그 기억을 잊도록 해준다고.... 살기 위해서요.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사람 만들어 가는 과정은 힘들었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하품 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투정 부리다가도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들은 저의 자랑이 되어주었습니다.

 솔직히 그 감정에 취해있었습니다. 애아빠는 바깥에서 부족함 없이 벌어다주니 나는 알뜰살뜰 살림 꾸리며 자식새끼들도 어디 모난 곳 없이 이쁘게 키우는 이 시대의 어머니상. 결혼 전까지 착실하게 다니던 직장도, 그곳에서 어엿하게 자리 차지하고 살던 나는 흐릿해진 지 오래였지만 지금의 나는 내 자리에서 이만큼 노력했고, 그 결과물인 아이들이 있으니까 난 이제 괜찮다,라는 자기 암시 같은 거죠.


 그런데 덧셈, 뺄셈도 손가락, 발가락 다 쓰며 겨우 풀던 아이들이 구구단을 외고 분수의 개념을 배우며 이해할 때 저는 묘한 허탈감도 느꼈습니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친구들을 몰고 와 자기네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낯설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아이들도 사회생활을 하는 사회 구성원으로 멋지게 성장하고 있는데 , 남편도 이직한 회사에서 2년 차 커리어를 쌓고 새로운 동료들을 만들어갈 때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인 건 저뿐이더라고요.

 결혼 생활 내내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습니다. 아이가 하나도 아닌 둘이고 남편은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 매달려야 해서 집에는 절대적으로 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점차 벽에 걸린 액자보다도 표정은 없어지고 애들 다투는 소리도 부부클리닉 재방송 소리에 묻어버린 채 그냥 나는 이래야만 돼, 여기 늘 있어야만 돼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올해 만 40이라는 나이 또한 저의 주저앉음의 큰 변명거리가 되어 주었죠. 인생은 40부터다! 방송에선 어느 명사의 명언이라고 또 반복되는 소리도 흐린 눈 하며 내 자리 지키기 급급했던 건 바로 나더라고요.


 어젯밤에 오랜만에 친정아버지가 친지 결혼식 때문에 집에 오셔서는 회사 id카드를 보여주시더라고요. 아버지는 몇 년 전, 같은 회사를 이미 정년 퇴임하셨는데 은퇴한 관련 업무 시니어 직원을 다시 채용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곤 재 취업에 성공하셨답니다. 무려 4차까지 진행되는 심층 면접에 166:1이라는 경쟁률 소식에도 '난 떨어지지 않겠다'라는 생각으로 버티셨다고 해요. 내막을 전혀 몰랐던 저는 그동안의 어떤 꺼내지 못한 마음들이 특 하고 터져 나오는 걸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는 참 가깝고도 먼 분이시죠. 저에게는 아버지의 정 보다는 본인의 커리어가 더 중요하신 분이셨으니까요. 그런데 id카드를 목에 거신 채 치아를 드러내고 자랑스럽게 웃으시는 그 모습 자체로 아버지가 40 평생 처음으로 저에게 몸소 산 교육을 하신 겁니다. 아버지. 아빠...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어떻게 그렇게 버티셨는지....!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도,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구나!' 탄식했습니다.


 오늘아침 일어나 가볍게 집 근처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보았습니다. 기적처럼 평소 하고 싶었던 작은 빵집에서 더불어 일 할 사람을 기다린다는 짧은 채용 공고를 보았고 수화기너머 밝은 목소리가 오늘 보자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단, 이력서 한 장을 채우라는 과제를 주셨습니다. 10년 만의 면접이라 정말이지 잘 보이고 싶습니다. 이력서도 10년 만에 다시 써보았습니다. 자꾸 무언가 부족한 거 같지만 쓸 건 빠짐없이 썼으니 면접, 잘 보고 오겠습니다. 운동화에 발을 넣는데 등뒤에서 '엄마! 파이팅~ 떨어져도 다른 빵집은 많아! 알지?'

...... 둘째 딸 목소리가 귀엽지만 왠지 찡합니다. 눈물 나기 전에 출발합니다. 10년 만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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