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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늘 죄인이 되는가

실패를 설계한 사회

by 나날 곽진영

실패보다 실패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더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묻지 않아도 결과를 재촉하는 표정, 잘 지내냐고 돌려 묻는 전화 한 통. 과하게 위로하는 마음도, 그럴 줄 알았다는 핀잔도 감당하기 어려운 시기가 있다. 그래서 실패를 겪는다는 건 한동안 나 자신을 숨기게 되는 일이다. 실패는 부족함의 증거이자, 책임져야 할 결과이기 때문이다. 관계가 멀어질까 봐, 존재가 흔들릴까 봐, 나라는 사람 전체가 부정당할까 봐.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 감정은 단지 순간의 좌절감이 아닌 죄의식이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말해도, 사회는 여전히 실패한 사람을 도덕적 실패자, 노력하지 않은 사람, 게으른 사람으로 본다. “그 정도 노력으로 될 줄 알았냐”는 말은, 결과가 나쁘면 원인은 언제나 너에게 있다는 선언이다. 사실상 실패는 허용되지 않는 사회. 실패를 경험했다는 사실보다, 그 실패를 겪게 된 원인을 개인 내부로 돌리는 구조가 더 잔인하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실패가 단지 의지의 문제인가?


우리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 서열을 유지하려면 기준이 필요하고, 기준은 늘 성공한 사람을 중심에 둔다. 상대적 성공에는 언제나 실패자가 존재한다. 누군가가 낙오해야 나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안전해진다. 경쟁은 어디에나 깔려 있고, 속도와 효율, 결과 중심의 시스템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특히 학교는 이 구조를 가장 일찍, 가장 깊게 내면화시키는 장치다. 어린 시절은 넘어졌다가 울고, 다시 일어나면서 ‘괜찮다’는 감각을 몸으로 익히는 시기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은 그 반대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실패가 얼마나 빠르게 점수화되고, 기록되고, 비교되는지를 경험한다.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길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너무 일찍, 너무 깊이, 배워버렸다.

다만 학교뿐일까. 수영이나 태권도처럼 예체능을 다루는 학원에서조차 ‘레벨 테스트’가 일상처럼 이루어진다. ‘이번 달엔 파란 띠 못 땄네요’라는 말 앞에서, 아이는 울고, 부모는 조바심을 낸다. 즐겁자고 시작한 운동에서조차 줄 세우기와 낙오가 아이를 기다린다. 학교 밖 자본주의는 더 가혹한 방식으로 실패를 계산한다.


우리는 이기는 법만 배우다 보니, 넘어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단순하고도 중요한 진실을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무지로부터 시작된 불안과 자본이 부추긴 욕망 속에서 우리는 실패를 배워야 할 기회를 잃고 있다.


요즘 상위권 학생들 중 일부는 첫 시험에서 내신이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학교를 떠난다고 한다. 검정고시로 방향을 바꾸고, 관계도 시간도 줄인 채 입시에만 집중한다. 그 선택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 건, 단 한 번의 넘어짐이 ‘이 길은 끝났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학교는 더 이상 실패를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 학업 이외의 것을 줄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


이제 와서야 실패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저 지나가는 감기처럼, 때로는 심하게 아프고 괴로울 수 있지만 결국은 회복된다는 것을. 실패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에 짓눌릴 일도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실패자가 되기보다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 남기를 택한다. 도전보다 무난함을, 가능성보다 안전함을 선택한다. 실패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삶을 얼마나 깊고 넓게 만들어주는지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패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기회일 수 있다. 최소한 타인을 공감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해도 괜찮다는 감각을 먼저 배워야 한다.


실패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등을 밀어주는 사회.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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