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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사회만 탓하려고?

다르게 살아보기로 했다

by 나날 곽진영

비교와 경쟁이 일상이 된 사회.

성적표에서 시작된 순위는 대학, 연봉, 거주지, 자녀 교육으로 이어졌다. 이 구조는 자본주의의 방식이다. 자본주의는 희소성 위에 존재한다. 모든 것이 숫자로 환산되고, 시장 논리로 평가된다. 더 높은 성과를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가난은 무능이고, 부유함은 능력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만든다.

이런 사회에서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출발선이 다르고, 기회가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서 정말 노력만 하면 되는 걸까? 누군가는 계속해서 숨을 헐떡이며 달리지만, 누군가는 에스컬레이터 위를 걷는다. 이 불평등은 구조적인 것이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왜 사회는 실패를 혐오하게 되었을까?

왜 가난은 죄가 되었을까?


이 구조를 만든 건 분명 사회다.

하지만 그 구조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은 결국 우리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타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조금의 실패나 멈춤, 탈선조차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 나도 그 정답을 숨 가쁘게 좇던 사람이기에 잠깐 넘어짐에도 스스로 생채기를 내기 바빴다. 그때의 멈춤은 끊임없이 나에게 물었다. '넌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거니. 어떻게 살고 싶어서 이렇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니.' 낙오자가 되느니 군중 속에 묻어가는 편을 택했다. 겁쟁이라고 해도 다른 선택은 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의 진짜 싸움은 1등이 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정답을 벗어날 용기가 아닐까.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꽃들에게 희망을』에는 기둥을 기어오르는 회색 애벌레들이 나온다. 모두가 오직 위를 향해 기어오르는 데에만 몰두한다. 옆을 볼 겨를은 없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서로가 서로를 밟으며 올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그 기둥 위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어두운 고치 안에서 자기와의 싸움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나비가 되는 것임을 책은 말한다. 이 장면은 앞서 열거했던 지금의 사회와 똑같다. 비교와 경쟁이 지배하는 구조. 그곳에서 애벌레는 결코 나비가 되지 못한다. 앞서 달리는 사람도, 중간에 멈춘 사람도, 뒤처진 사람도 모두 나비가 될 수 없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기둥을 오르고 있을까.


내가 이 책을 읽었던 시기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택을 감행했던 때였다. 기어코 살아보겠다고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하는 삶은 때때로 부끄럽고, 많이 외로웠다. 잠을 못 이룰 만큼 불안한 날도 있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가장 치열하게 살아야 할 때 너는 대체 무슨 선택을 한 거니.' 내 방식대로 살기 위한 선택인지, 안분지족을 위한 변명인지,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비가 되기로 했다.


나는 내 몫의 감각을 바꾸고 싶었다. 주변의 비아냥에도 다른 속도, 다른 목표, 다른 방식으로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다. 사회가 가라고 한 길을 따라 모범생의 삶을 살아온 내가 처음 오답을 써보기로 했다. 이전에는 감히 시도하지 못한 정답 밖의 삶. 나는 고치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치열하게 묻기로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내 또래의 친구들에겐 조금도 먹히지 않는, 지금 치열하게 살아내는 이들에게는 사치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실험이,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몰라 불안에 떠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답을 벗어난 삶은 불안하고 두렵고, 아무도 그 길을 알려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우리가 다르게 살기로 결정할수록, 오답을 써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조금씩 정답의 기준을 다시 쓰게 될 거라는 것을.


만약 당신이 고치 앞에 서 있다면 용기를 내길. 세상의 기준에서 잠시 벗어나도 괜찮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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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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