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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사회

이 세계에 균열을 낼 수는 없을까

by 나날 곽진영

얼마 전, 서울의 명문대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결핍’에 대한 주제로 강연을 하던 중, 한 친구가 말했다.


“계속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가끔은 내가 지금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요. 계속 뒤처지는 기분입니다.”


아마 이들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잘하는 아이로 살아온 이들이었을 것이다. 정해진 루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항상 부모의 기대에 부흥하며 완벽을 좇아온 이들.


“내 아이를 이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전국의 엄마들이 돈과 시간을 쏟아붓고 있어. 너의 삶을 간절히 바라는 아이들이 너무 많은걸.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 말에 그는 눈시울이 벌게졌다. 지속적인 긴장과 비교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이 세대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반면 이런 이야기를 한 친구도 있었다.

“영유부터 대치동까지.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만약 경쟁이 없었다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물론이다. 이 말도 맞다. 경쟁이 동력이 되어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성과와 위치에 있을 수 있고, 대한민국이 빠르게 눈부신 성장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문제는 이 사회가 경쟁이라는 하나의 방식만을 유일한 정답으로 믿고 있다는 데 있다. 모두가 그 정답을 향해 줄을 서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그 과정에서 누구도 온전히 만족할 수 없고, 심지어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서조차 계속 뒤처지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구조는 단지 학창 시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비교는 더 교묘하고 고약한 방식으로 계속된다. 어린 시절엔 그저 나 하나만으로 평가받았다면, 이제는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평가의 대상이 된다. 어떤 집에 사는지, 배우자의 직업과 연봉은 어떤지, 아이의 학교는 어디인지, 성적은 어떤지. 기준은 학력에서 부의 크기로 옮겨간다.


자본주의 사회는 ‘지금 당신이 가난하다면, 그건 당신이 덜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끝없이 주입한다. 게으름, 나태함, 무능함으로 설명되는 가난은 죄가 된다.


왜 노력하지 않아? 왜 그렇게밖에 살지 못해?

마치 모든 인생이 '노력'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 단순하고 위험한 논리는, 가난을 개인의 윤리 문제로 만든다. 경제적 조건이 아니라, 도덕적 결함처럼 느끼게 만든다. 정말 그럴까? 노력만으로 부자가 될 수 있을까? 기회는 공평하지 않고, 출발선은 다르며, 누군가는 줄곧 달리기만 하고 누군가는 줄곧 숨만 헐떡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믿음을 놓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라도 붙잡아야 이렇게 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아직 덜 노력했을 뿐이야.”

결국 이 사회는 실패를 금기시하며, 가난을 낙인찍고, 성공만을 정답이라 말한다. 이 틀을 깨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 누구도 온전히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 그리고 우리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더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느끼는 그 감정이 불안의 본질이다. (알랭 드 보통, 불안)



불안은 결코 개인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사회가 끊임없이 비교하고 줄 세우는 방식을 우리 안에 깊이 내면화시켜 온 결과다. 삶이란 늘 더 나은 선택을 요구받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계속 증명해야만 한다. 앞서가는 사람도 불안하고, 뒤에 있는 사람도 불안하다. 길을 벗어난 사람은 재기조차 어렵다.


누구도 자신 삶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구조적 비극. 이 세계에 균열을 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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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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