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챕터를 마치며, 너무 늦은 질문
부산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예술고에 재학 중이던 여고생 세 명이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꽃도 피우지 못한 아이들이 스스로 생을 저버렸다.
유서에는 ‘학업 스트레스와 진로 불안’이 담겨 있었다.
누가 그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걸까.
이 사건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치열한 입시 경쟁과 정답만을 좇는 사회,
조금만 멈춰도 낙오자로 낙인찍히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끝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겠지.
사건 후 교육청은 긴급대책반과 현장 점검에 착수했지만, 이는 사후 대응일 뿐이다.
정작 우리가 해야 하는 질문은 따로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어떻게 이 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는가.
우리는 이 구조를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떠받들고 있는가.
이 아이들의 죽음은 단지 슬픔 이상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누가 정답을 정하는가.
실패의 낙인은 우리를 어디까지 궁지로 모는가.
‘정답’을 향한 맹목적 질주는 생명을 위협할 만큼 가혹하다.
그들이 단지 나약해서일까.
아니다. 그들이 감당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탓이 아니다.
우리는 당연하게 그 압박의 무게를 견디라고 말해왔다.
이 사건이 그저 나의 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이 사회의 일원이자, 아이를 키우는 어른으로 나는 과연 이 죽음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스스로에게, 자식에게 정답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정답의 굴레에 대한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나의 10대와 20대를 돌아보고, 나의 세 아이를 바라본다.
경험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먼저 다르게 살고자 했던 이유다.
그래야 내 뒷모습을 보고 자라는 아이도 다르게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틀려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오답이어도 좋으니 제발, 너의 삶을 살아라.
오답이 오히려 네 세상의 해답이 될 테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