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하지 않고도 자랄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까?’
공부를 잘하는 아이 혹은 나에게 효도하는 아이 같은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는 아이로 크기를 바랐다. 부모가 바라는 삶, 부모가 좋다고 여기는 삶이 아닌 아이 자신이 그리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부모인 내가 대신 길러줄 수 없고, 가르쳐 줄 수도 없다. 그래서 아이를 낳은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고민했다. 쉽지 않은 세상에 생명을 탄생시킨 사람의 의무감, 혹은 책임감 때문에.
당시 건설사에 다니던 남편 덕에 우리는 수도권 곳곳을 옮겨 다니며 1, 2년씩 짧게 거주했다. 부천에선 목동 학군, 남양주에선 잠실 학군, 광주에선 분당 학군. 만나는 엄마마다 학령기가 되기 전에 다음 도시로의 이사를 이야기했다. 이유는 대부분 아이의 교육. 그런 이야기를 듣고 올 때마다 마음이 복잡했다.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고, 한글을 띄엄띄엄 읽는 아이들을 보면서 입시를 걱정하는 모습이 낯설고 한편 기괴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지 궁금했지만, 아이의 20년을 오직 대학 입시라는 목표로만 설계하는 그녀들에게 결국 나는 어떤 것도 묻지 못했다.
앞서 내 아이만큼은 나처럼 경쟁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쉬어갈 수도, 넘어질 수도 있었으면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이 환경에서 우리 아이만 다르게 키울 수 있을까? 이 불안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고하게 눈을 감고 있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아이를 이곳에서 키울 수는 없다.’ 그건 철저히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한때 능력주의 신봉자가 갑자기 아이를 낳았다고 개과천선할 수는 없는 법.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달라질 수 없었다.
남들보다 더 잘하는 아이가 아닌, 자기 속도로 잘 사는 아이. 어떤 선택을 하든 자기 삶을 감당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딱 그 마음으로 우리는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그 힘은 쉴 수 있는 시간, 스스로 깨달아가는 시간 속에서 자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고, 자연을 가까이 두고, 때로는 혼자 있는 법을 배우는 시간. 그 시간을 통해 아이는 비교가 아닌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감각을 익히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 하나로 아이들은 지금까지 사교육 없이 자랐다. 그것은 교육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아니다. 아이의 생각이 자라나는 절대적 시간의 확보 때문이었다.
이 실험은 나의 첫 책 『우리는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에 담겨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 남편이 대기업을 그만두고 이직하며 급여가 절반 가까이 줄었던 이야기까지. 그 모든 선택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부모는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내가 첫 책에서 언급한 ‘1미터 육아’는 곁에서 아이를 지켜봐 주는 것, 아이가 손을 뻗을 때 가장 먼저 잡아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거리의 육아법이었다. 그 책을 낸 지 어느덧 5년이 지났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첫째는 중학생이 되었고, 갓 걸음마를 떼던 막내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다시 도시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큰 확신을 갖고 살고 있다.
학습은 ‘배우고 익힌다’라는 뜻이다. 아이는 가르치지 않아도 매일같이 배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관계 안에서. 문제는 그렇게 배운 것을 몸에 익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혼자 생각하고, 곱씹고, 정리하는 시간. 그 시간이 있어야 배움이 삶이 된다. 요즘 아이들은 배우는 양은 많지만, 익히는 여유는 부족하다. 어쩌면 이 아이들에게 진짜 부족한 건 시간보다도 멈춤일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서는 숙제를 하고, 하루의 기록을 쓰고, 해 질 무렵까지 동네 아이들과 뛰논다. 놀이처럼, 쉼처럼 책을 읽으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물론 모든 것이 평탄한 건 아니다. 자유롭게 시간을 쓰기 때문에 더욱 관계에서 갈등을 겪기도 하고,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학업의 공백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더 많은 사교육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아이가 자기 속도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논의하고 고민한다.
첫째는 확실히 공부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수업 태도는 좋다는 피드백을 받는다. 대신 글쓰기나 그림 대회에서는 학원 한 번 다니지 않았는데도 상을 받아온다. 매일같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인체 구조를 공부하기 위해 관절 인형을 사 와 혼자 인체 비율을 연구하고, 어느 날은 이야기를 구상하며 한 장면 한 장면을 그려낸다. 잘하는 것을 찾아서 즐기고, 스스로 깊어지는 모습. 그게 우리가 바랐던 삶의 방식이었기에 나는 그저 응원한다.
아이들은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의 사유와 감각으로 문제를 풀어나간다. 누구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 사이에서 부모의 역할은 단순하다. 지켜보는 것. 아이가 도와달라고 손을 뻗을 때까지, 조용히, 그러나 절대 놓지 않고.
우리 집 세 아이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굉장히 많은 편임에도,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다. 도움을 요청하기보다는 가능한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 그럼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이 우리라는 믿음이 있다. 사이가 좋을 때도, 좋지 않을 때도 그들의 마음은 가장 먼저 부모를 향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게 내가 선택한 부모의 자리니까.
이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이가 자랄수록, 육아에 대해 쓰는 일은 점점 더 조심스러워진다. 그 아이는 내가 아니고, 삶은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기에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과정을 기록해 본다. 완성된 답이 아닌, 여전히 과정 속에 있는 사람으로서.
“경쟁하지 않고도, 우리는 잘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