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에 대한 환상
왜 잘해왔던 사람일수록 더 크게 무너질까.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학업 성취가 자존감의 근거가 된다. 성적은 노력의 결과이자 존재의 증명이 되고, 오랜 시간 반복된 인정은 잘해야 사랑받는다는 내면의 법칙이 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는 점점 더 잘하는 아이들 속에 놓인다. 예전엔 반에서, 학년에서 상위권이었지만 이제는 전국에서 상위권이었던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있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별로 특별하지 않다’는 감각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문제는 그들이 학업 외의 영역에서 자신을 증명해 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관계 속에서, 놀이 속에서, 실패 속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부가 흔들리면 삶 전체가 흔들린다. 조건부 자존감은 정체성 전체의 붕괴로 이어진다.
2023년 SBS 보도에 따르면, 취업이나 학업에서 실패한 뒤 사회와 고립된 청년이 전국적으로 51만 명에 이른다. 명문대생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카이스트의 한 박사과정 학생은 이렇게 고백했다. “좋은 직장, 번듯한 미래 계획, 뭐든 척척 해내는 동문들 사이에서, 실패를 만날 때마다 혼자 시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싱싱한 잎들 사이, 혼자 시든 노란 이파리처럼.” 자신을 오랫동안 ‘우수한 사람’으로 규정해 온 이들은 실패를 단순한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은 곧, ‘나는 더 이상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기부정으로 연결된다.
이런 현상의 바탕에는 ‘완벽함’에 대한 환상이 있다. 완벽해야 인정받고, 실수는 용납되지 않으며, 결과는 언제나 기대 이상이어야 한다는 기준. “너는 대단해.”, “이번엔 몇 등 했어?”, “속상하겠다. 다음번엔 더 잘할 수 있어.” 잘하면 기뻐하고, 못했을 땐 스쳐 지나가는 실망스러워하던 어른들의 표정. 그 사이에서 ‘괜찮은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조용히 자리잡지 않았을까.
플라톤의 『향연』에는 인간이 원래 두 얼굴, 네 팔과 다리를 지닌 완전한 존재였다는 신화가 나온다. 신들은 그 강함을 두려워해 인간을 반으로 잘랐고, 그 이후 인간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맨다. 사랑은 그렇게 결핍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반대로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다던 ‘완전함’을 상상해 보면, 오히려 기형에 가깝지 않나. 두 얼굴, 네 다리, 네 팔이 엉켜 있는 하나의 몸. 그건 아름답기보다 징그럽다. 우리가 끝없이 추구하는 완벽이란 것은 어쩌면 그런 기괴함이 아닐까.
우리 사회는 문제풀이에 최적화된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길러낸다. 정답 찾기에는 능숙하지만, 정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정작 사회에 나가 맞닥뜨리는 질문들은 대개 모호하거나, 계속 변하거나, 답이 아예 없다. 학습 좌절감은 공부를 못해서 오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잘해왔던 사람에게 더 가혹하게 찾아온다.
성취가 자존감을 떠받치는 유일한 기둥일 때, 그 성취가 멈추는 순간 사람이 무너진다. 우리는 실패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실패를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허락받지 못했다. 그래서 문제는 단순히 실패 그 자체가 아니다. 실패한 이후에 따라오는 낙인, 평가, 자기혐오. 우리는 실패를 겪고 무너지는 게 아니라, 실패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해서 무너진다. 한 번의 좌절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잘못된 선택 하나, 성과 없는 시도 하나가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실패가 두려워 시도하지 않고, 시도하지 않아서 더 무력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작아지고, 멈추고, 스스로를 숨긴다.
그 물음은 결국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왜 우리는 실패한 사람을 늘 죄인 취급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