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가지면 덜 행복할까?
세상은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학군, 더 좋은 스펙. 끝없는 ‘더 좋은 것’들 사이에서 삶은 자꾸 무겁고 버겁기만 하다. 시작도 전에 포기하겠다는 청년들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런데 살아보니 행복은 가진 만큼 커지지 않는다.
정말 더 많이 가져야만 행복할까?
덜 가지면 덜 행복할까?
남편의 이직으로 급격히 소득이 줄고, 집을 줄였을 때 우리는 실험을 시작했다. 월 200만 원으로 네 식구 살기. (그 시기에 셋째가 생겨 다섯 식구가 되었다.) 이 실험은 단순히 적게 쓰는 법이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남기고, 그렇지 않은 것은 덜어내는 일이었다. 더 많이 갖지 않아도 괜찮은 삶. 그게 정말 가능할까? 그 질문의 답을, 우리는 몸으로 겪으며 찾아갔다.
대출까지 받아서 좋은 집에 살아야 할까?
보험은 정말 이 정도로 필요한가?
우리 아이에게도 그 교육이 필요한 걸까?
...
우리는 불필요한 고정비를 덜어 내며 삶에 꼭 필요한 것만 남겼다. 단순히 절약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삶을 더 선명하게 그려나가는 작업이었다.
미디어도, 주변 사람들도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긴다. 유행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소외되지 않기 위해, 있어 보이는 라이프 스타일을 위해. 그 많은 소비가 정말 나를 위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오마카세가 유행이면 나의 주머니 사정과 상관없이 꼭 먹어봐야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좌절한다. 여름휴가엔 해외로 여행을 떠나야 하고, 유행하는 옷이나 가전제품도 사야 한다.
무엇이든 다수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소비해야 하는 사회. 결국 모두가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비슷한 삶을 사는 사회.
나는 하나로 똘똘 뭉쳐있는 취향의 군집에서 한 발짝 물러나 보기로 했다. 뒤처지는 사람으로 보이면 어떤가. 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르면 또 어떤가. 취향도 선택이고, 나는 그 선택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설령 후진 취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가. 그 또한 유니크하지 않은가.
한동안 나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자주 입고 다녔다. 산에 살며, 거기에 세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엄마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함을 추구한다는 뒷말을 듣기도 했지만, 사실 그 옷은 2, 3만 원짜리 가성비템이었다. 잦은 세탁에도 끄떡없고, 후줄근하지 않게 오랫동안 입을 수 있는 실용적인 옷. 나는 유행보다 나에게 잘 어울리는 것을 골랐고, 그 선택이 오히려 나만의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말고.) 남 보기에 좋으려면 끝이 없다. 정말이지, 어쩌라고 다. 내 인생, 내가 좋은 대로만 하고 살아도 모자란 시간이다. 눈치 보랴, 비교하랴… 그 와중에 도대체 언제 행복할 건데?
장기하의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너한테 십만 원이 있고 나한테 백만 원이 있어. 그러면 상당히 너는 내가 부럽겠지. 짜증 나겠지. 근데 입장을 한번 바꿔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고. 과연 니 덕분에 행복할까. 내가 더 많이 가져서 만족할까. 아니지. 세상에는 천만 원을 가진 놈도 있지. 난 그놈을 부러워하는 거야.
행복이든 부든 늘 상대적이다. 더 많이 가진다고 해도 늘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다. 더와 덜은 언제나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상대성 속에서 내가 택한 방식은 내가 가진 것 안에서 충분히 만족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절약도 아니고, 인내도 아니다. 기준을 바꾸는 일이고, 욕망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는 일이다. 누구의 삶을 흉내 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의 속도와 크기를 정하는 것. 그 선택만으로도 우리는 덜 가지면서도 덜 불행하지 않은, 어쩌면 훨씬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경제적 자유는 더 많이 버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덜 써도 흔들리지 않는 삶에서 시작된다. 선택적 결핍의 삶은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