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눈을 피해 피아노 연습하는 척하며 책을 봤다는 어느 책의 구절을 읽다가 나에게도 그런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한참 사춘기를 겪던 중 2 아이는 우연치 않은 계기로 허구의 세계에 발을 디밀었다. 판타지 세계로의 입문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정의로움과 로맨스, 절대적인 힘 같은 것들은 당시 소녀의 결핍을 건드리는 소재였으니까.
퇴마록부터 시작해서, 왜란 종결자, 파이로 매니악까지 이우혁의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그와 비슷한 판타지 소설들을 들쳐보다가 묵향에 정착해서 하루하루 신간 소식을 기다렸다.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알게 된 김진명 작가의 역사 소설에 빠진 나는 그해 방학 종일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도서 대여점이 그때는 동네 어귀를 조금만 걸어도 몇 개씩 보일만큼 흔했다. 내가 주로 애용하던 곳은 일찍 열고 늦게까지 닫지 않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한 주인아저씨가 운영하는 대여점이었다. 종종 사장님이 도착하기도 전에 문 앞에서 쭈그리고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그럴 거면 여러 권을 빌려가지 그러니?"
조금 늦은 오픈으로 민망해하던 아저씨에게, 어, 그럼 너무 빨리 읽어서 안돼요.라고 대답했던가. 그때에 내 한 달 용돈은 3만 원이었는데, 소설책 대여는 한 권에 500원이었다. 하루에 두 권이 내가 쓸 수 있는 돈이었다. 두 권을 후다닥 읽은 날은 빨리 잠이 들려고 애쓰기도 했다. 아침이 와야 그다음을 읽을 수 있으니까. 만약 도서관이 옆에 있었거나, 도서관 이용하는 법을 내가 알았더라면, 온종일 도서관에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방학이 끝난 뒤였다. 학교와 학원을 다녀와서 저녁을 먹고 숙제를 하고 나면, 시간이 늦어졌다. 그때부터 책을 읽으려니 새벽 한 시, 두 시가 되기 일쑤였다. 처음엔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는가 했더니, 소설책을 끼고 사람이 방에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몰입하고 있던 나를 발견한 엄마가 책 금지령을 내렸다. 밤 10시만 되면 방 불을 꺼버리셨다. 유일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뺏겼다. 지금이 피크 타임인데, 갑작스럽게 책을 못 읽게 된 나는 처음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깨달았다. 불 꺼진 방에 누우면 읽다 만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아, 안 되겠다.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물건이 있었다.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지다 씨익 미소 지으며 발견한 건, 바로 전선과 꼬마전구.
과학 시간에 전기의 흐름을 배우면서 샀던 전선과 꼬마전구가 갑자기 떠올랐던 건, 책을 향한 내 간절함이 통했던 걸까. 직렬과 병렬을 연결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참 만지작 거리던 나는, 전구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걸 보고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런 방법을 생각해내다니, 천잰데? 스스로를 기특해하며 밤만 되면 이불속으로 들어가 전구를 켰다. 혹시라도 누가 들어올까 봐 이불 속에 들어가 혼자만의 비밀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점점 눈이 아프고 침침해진다.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고, 수업 시간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위태로운 새벽 책 읽기를 이어가던 어느 날, 과욕을 부려 전구를 연달아 연결했다가 '퍽'하고 전구 하나가 깨져버렸다. 아뿔싸.
조심스레 이불을 들고 밖에서 털다가 엄마한테 걸려 먼지 털리도록 혼난 날. 내 마약 같던 책 중독도 끝났다.
나는 사춘기를 크게 겪지 않고 잘 지나왔다고 얘기하곤 했는데 판타지 소설과 함께 떠오른 몇몇 기억이, 어쩌면 나는 밖으로 사고를 치기보다 뭔가 하나에 미친 듯이 몰입하는 것으로 그 시기를 지나온 것 같다. 그 와중에 학생의 의무를 성실히 했던 내가 대견하고, 공부가 아닌 다른 것에 몰입하는 딸을 정도가 심하다고 느낄 때까진 내버려 둔 부모님께 고맙기도 하다.
어제 문득 내 공간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다가 이불속에서 스릴 넘치게 책 읽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꽤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썼다. 뭐든, 하지 말라는 일을 해야 더 재밌는 것 같다. 나에게 지금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이 뭘까. 그것부터 해 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