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변하는 걸 느낄 때마다 나는 어린 시절 살던 오래된 빌라를 떠올린다. 빌라 마당에는 보라색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그때엔 포도나무인 줄 알았던 제법 몸통이 굵은 등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여름 뙤약볕을 가려주는 등나무 덩굴 아래엔 나무 밑 둥을 베어 만든 의자 몇 개가 놓여있었다. 해가 긴 여름밤이면 동네 어른들은 하나둘 벤치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아이들은 밤이 깊도록 고무줄이며, 땅따먹기 같은 놀이를 했다.
우리 집은 빌라 2층이었다. 지하 단칸방을 전전하다 처음 이 빌라를 사서 들어올 때, 엄마는 방 3개 중 2개에 월세를 줬다. 점점 형편이 나아져 세입자를 한 명씩 내 보내고 드디어 내 방을 갖게 되던 날, 나는 냉큼 등나무가 보이는 제법 창이 큰 방을 선택했다. 춥다는 엄마의 만류에도 창 바로 아래에 침대를 뒀다. 창밖엔 딱 내 눈높이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은행잎이 조금씩 노랗게 물들어 갈 때 즈음이 되면, 두꺼운 겨울 이불을 꺼내 들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노란 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매서운 바람이 불 때까지도 내 방 창문은 늘 활짝 열려있었다. 때로는 밤늦도록 노는 친구들의 놀이 소리를 들으며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고, 본의 아니게 동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많이 알기도 했다. 창 아래에 있는 등나무 벤치에선 아주머니들의 은밀한 뒷말과 연인들의 수줍은 고백과 한 번씩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는 어느 집의 부부싸움까지, 사람들의 이야깃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겪어보지 않는 세상이 들려주는 소리에 아이는 혼자 배시시 웃곤 했다.
물론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 부모님은 워낙 다른 사람들이었다. 고지식하고 조용한 아빠와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엄마는 때때로 많이 부딪쳤는데 특히 술에 관해선 첨예하게 대립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아빠는 술은 절대 입에 안 댔고, 엄마는 하필이면 술 애호가였다. 보통은 침대에 누워 이불속에 폭 파묻혀 있는 꼬마가, 창문에 수시로 고개를 내밀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고 있는 날은 엄마가 친구들과 술 약속이 있을 때였다. ‘우리 엄마 좀 빨리 집에 오게 해 줘.’ 지금은 귀엽지만, 그 당시엔 절박했던 아이가 소원을 빌었던 건 창문 앞 은행나무. 아무리 애써도 가시지 않는 한기에 두꺼운 이불을 꽁꽁 싸매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마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졸린 눈을 부릅뜨고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시간. 그날만큼은 얼른 창문을 닫고 잠들고 싶었다.
그 빌라에서 자그마치 15년을 살았다. 외로운 밤 유일한 친구였던 내 눈높이의 은행나무는 3층 빌라를 넘어설 만큼 우뚝 자랐고, 창문으로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던 어린아이는 창밖에서도 제법 자기표현을 할 줄 아는 숙녀가 되었다. 그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곳은 여전히 나에게 마법의 공간이었다. 두꺼운 이불속에 기어들어가 머리만 쏙 빼놓고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경직되어있는 마음이 사르륵 녹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그 집을 떠나게 됐다. 준비도 없이 안전공간을 잃은 나는 꽤 오랫동안 방황을 했다. 이사 간 집에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계속 밖으로 돌았고, 사춘기보다 더 사춘기 같은 20대를 보냈다. 가끔 마음이 무너져 더는 안 될 것 같은 날은 나도 모르게 그 빌라를 찾았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2층 창문을 바라보다가 꾸역꾸역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오곤 했다.
얼마 전, 마음이 동해 그 동네에 갔다. 남편에게 얘기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살던 동네, 내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빌라, 내 방에서 보던 은행나무와 등나무 벤치. 그리고 지금과는 달랐던 어린 나를 이야기해주러. 그런데 내가 살던 오래된 빌라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은행나무도, 사람들이 쉬어가던 벤치도 모두 사라졌다. 조금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새로운 빌라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휑했다. 한 번은 꼭 그 공간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희미해지기 전에 기억해두려고 이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오랫동안 잊어버려서 미안하다고. 친구도, 부모도 해 줄 수 없었던 엄청난 위로를 해줘서 고마웠다고. 안녕, 나의 케렌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