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날 작가 Mar 20. 2022

숨통이 트이는 시간. 숨통이 트이는 사람

아, 이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바람을 좋아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저녁 바람만 맞으면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어 얼마나 다행인가. 지옥엔 바람이 없다는데 그럼 여기가 지옥은 아닌 듯하니 또 얼마나 다행인가. 하루 중 이 시간만 확보하면 그런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우리 인간은 복잡하게 만들어졌지만 어느 면에선 꽤 단순해. 이런 시간만 있으면 돼. 숨통 트이는 시간. 하루에 10분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아, 살아 있어서 이런 기분을 맛보는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시간.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다가 이 구절에서 문득 J의 편지가 떠올랐어.


브런치 발행을 누르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내 글에 눈물이 날 뻔했다는 J의 말에 내가 무슨 이야기를 썼지? 싶었는데 답장을 읽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지. J가 그렇게 꾹꾹 누르고 있던 시간에 내 편지가 닿아서 숨통이 트였다는 것, 그 사실 하나에 안도했어. 다행이다. 무엇이 되었든 J의 지옥 같은 시간을 잠시라도 감싸 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며칠 전 내가 같이 듣고 싶다며 보낸 노래에도 J는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잖아. 힘들고 속상했던 하루 끝에 타이밍이 좋았다고 말이야.


그러고 나니 여러 번을 읽었는데도 어떻게 답장을 써야 할지 모르겠는 이 편지를 오늘에서야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어. 어쩌면 J는 그저 내가 나로 존재하게 하는 사람, 아주 잠깐이라도 나의 존재의 의미를 물어주는 사람이 필요했구나, 하는 생각 말이야. J의 편지를 며칠 동안 이해하려고 애쓴 나의 답이 어때? 반은 맞았으려나.




우리 집은 요즘 막내의 코로나 확진으로 비상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섯 명이 한꺼번에 걸려야 한다며 마스크를 벗고 지냈는데 서로의 면역력이 어찌나 다른지 한 명씩 코로나 확진 소식을 알리는 중이지. 격리 생활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문제는 급격히 떨어지는 내 컨디션이었어. 목도 아프고 코도 막히고 열도 오르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두꺼운 파카를 입고 끙끙 앓고 있는데 엄마가 반찬 좀 해다 줄까? 하는 전화가 왔어. 평소의 나라면 힘들게 무슨 반찬을 하냐고, 잘해 먹으니 걱정 말라고 했을 텐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엄마, 두부조림 먹고 싶어."라고 말을 했어.





어제 엄마가 바리바리 반찬을 만들어서 집 앞에 두고 갔는데, 내가 주문한 두부조림이 냄비에 가득했어. 내 기분이 어땠는 줄 알아? 아이처럼 신이 나더라고. 남편한테도, 애들한테도 '이거 할머니 반찬 중에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라고 몇 번을 말했는지 몰라. 언제 아팠냐 싶게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어.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나는 이제야 엄마한테 어리광 부리고 칭얼거리기도 하는 외동딸이 된 기분이었어. 아마 엄마도 그랬을 거야. 항상 쌀쌀맞게 알아서 해요,라고 말하는 딸이 엄마표 두부조림을 먹고 싶다니 얼마나 신나서 저걸 했을까 싶더라고. 내가 엄마에게 온전히 엄마의 자리를 내어줬다는 생각이 들었어. 참 이상한 말이지...


그런데 나는 이제 좀 알 것 같아. 혼자 세 아이를 키우는 게 기특하면서도 절대 곁을 내어주지 않는 딸이 엄마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나밖에 없는 딸이 어려워서 엄마는 또 얼마나 서러웠을까. 그 서러움을 내가 짐작이라도 하게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난 뭐든 혼자 하는 게 편하고 익숙한 사람이라, 누군가 옆에 있는 것이 오히려 짐이 되는 사람이라 그렇게 알아서 잘 살아왔어. 이런 독립성이 내 장점이라고 믿어왔는데 그런 내 모습이 누군가에겐 곁을 내어주지 않는 벽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걸 요즘 새삼 느끼게 돼.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조차 그랬으니까. 나로서는 예의를 지키는 일인데 그조차도 상대에겐 거리를 두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도 말이야. 그래서 애써 표현을 해야 하는구나 싶어. 오해가 되기 전에. 왜곡이 되기 전에.


물론 상대가 원하는 말을 원하는 방식으로 해줄 수는 없겠지. 서로 다른 사람이니까. 하지만 마음이 담기면 그건 어떤 식으로든 전해지지 않을까? 이렇게 별 의미 없는 글로도, 무심코 전한 노래로도 J의 마음에 닿았던 것처럼.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표현들을 해석하는 열린 마음이겠지. 상대가 전해오는 갖가지 표현들 속에서 진짜 마음을 알아채는 일. 어쩌면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추신. 일의 기쁨과 슬픔의 빛나 언니는 눈치도 없고 센스도 없지만, 그래서 '나'의 신경을 계속 긁어대지만 그녀의 표현 방법이 조금 달랐던 걸까? J의 말처럼  전적으로 '나'의 시선으로 쓰인 빛나 언니의 사정은 왜곡되었을 수도 있을까? 소설이 뜨문뜨문 떠올라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아쉽게도 코로나 확진이라 빌려볼 수가 없었어.


나는 상대의 의도와 상관없이 반복해내 신경을 건드리는 일을 만드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야. 겉으로는 잘 지낼 수 있겠지만 마음의 거리는 훌쩍 떼어놓는 거지. 때로는 상대의 의도하지 않는 무심함에 배려받지 못한 상처를 입기도 하거든. 그럼 나는 '나에게 왜 그럴까'하는 의문을 계속 가져야 하잖아. 나는 지속적으로 내 에너지를 빼앗기는 관계는 원하지 않아. 그녀의 특별한 사정까지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이 내게는 없는 것 같아. 나는 그렇게까지 누군가한테 배려심이 넘치는 타입이 아닌가 봐.


이 책은 어느 날 다시 읽어봐야겠어. 그래서 이걸 어디에 끼워 넣어야 할까 엄청나게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추신으로 넣어 :)


 







매거진의 이전글 표현하는 마음,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