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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작 Dec 26. 2020

흐르는 강물처럼3

선택 후에 일어나는 것들

그 때, 나에게 실험실은 세상을 만나는 첫걸음이었다. 난 교수님의 첫 추천자였다. 하루쯤 고민이 되었다.

"좋은 자린데 어떻게 공부 좀 해볼래요?"

"부모님과 상의해보고 말씀드릴게요, 교수님"


과학 나와는 상관없던 과목이었다. 취업이 중요하다는 선배의 말에 떠밀려온 경우이기도 했.(앞가림을 그 누가 대신하다니 참...) 아... 그래도 정말 다행이었다. 입학 후에라도 전공과목에 재미를 었으니... 마치 이상형은 아니지만 말이 좀 통하는 이성처럼...알수록 더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갔다. 시험 결과도 보기 좋게 쌓여갔다. 


집에서 실험실까지는 거리가 좀 멀었다. 하지만 일, 사회, 돈에 대해  개념이 없었던 그땐  삶의 순리의 물살을 타듯, 당연히 가야하는 걸로 알았다. 친구들보다 먼저 일할 생각에 우쭐하니, 첫 단추가 절로 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철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셔틀버스를 탔다. 정문에서 L동까지 가는데도 차로 10분이나 걸렸다. 와!... 호수와 수목원이 펼쳐졌다. 감상에 빠져들다가 허둥지둥 L4 건물로 드는 길목에서 내렸다. 구름다리를 지나자 수질 분석실이 가까워짐을 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삐쩍 마른 곱슬머리의 대학생이 보였다. 그 사람은 복잡한 소리가 나는 방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기기들의 열기가 느껴졌다.


첫날, 환경 분과별 박사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방 사람들은 남색 부직포 앞치마를 두르고 팔토시를 하고장갑고 있었다. 자기 자리에는 앉을 세도 없었다. 통로를 뺀 나머지에  탁자가 빼곡히 있었다. 갈색병이 많았다. 큼직한 후드, 대형 오븐, 대형저울, 대형부직포.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팀원들은 피펫과 전자저울을 다루는데 익숙했다. 물 뜨는 신입이 된 난 온갖 눈금에 예민해져 갔다. 대기도 아닌 폐기물도 아닌 수질 실험실이니 무엇보다도 생물학적, 화학적으로 폐수가 깨끗해지는 시각적 마법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마냥 신기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업무는 온통 숫자로 둘러 싸여 있었다. 시료를 담고 시약을 넣고 반응을 보기 위해 퍼니스나 후드에 넣고 시간을 재고 결과를 데이터로 정리하기의 업무를 익혀나갔다. 그리고는 매일이 설거지의 연속이었다.

 초중고 학생들이 진로 체험을 다양하게 하는 이유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걸  찾아내는 거라더니, 실험실의 일은 아마 내가 앞으로 평생 싫어하게 될 ... 밥벌이로는 절대 하지 않게 될거라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극혐의 진상을 확인하러 여기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이씨... 그걸 깨뜨리면 어떻게 해?"

내 곱슬머리 사수는 처음 볼 때부터 그럴 줄 알았다. 나에게 앙칼지게 짜증을 냈다. (허구헌날 깨지는 스트레스를 나에게 푸는가 싶었다)

"저.저.. 빠..빨리 꺼내야지!..."

"네에~"

'위험한 건 나도 알거든' 자칫 화재가 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인지라 흥분하는 사수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적정온도와 적정시간, 적정량을 맞추는데 익숙지 않아, 시료를 뒤엎고 깨뜨리고 다시 또다시, 재실의 연속이었다. 아하... 종종 슬러지가 높은 온도에 말라 굳어서 플라스크가 닦이지 않았다. 약품으로 만든 또 다른 약품을 세제 삼아 산더미 설거지 쇼를 혼자 하고 있었다. 더구나 한 계절에 가죽구두며 청바지를  켤레씩 몇 벌씩 뚫어놓는 참상까지... 아무리 호기심이 많은 나지만 반복되는 예외적인 결과들이 아주 를 마르게 했다.



하지만, 매번 같은 순서와 방법인데 다른 결과를 얻는 하루하루는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처럼 날 더

욱 실험에 몰입하게 했다. 후드에 얼굴만 넣고 몸에 해로운 연기에 숨을 쉬어도, 고온 오븐에 넣은 시료를 세 시간마다 꺼내 줘야 하는 번거로움도 잊게 했다. 도구들과 기기가  낯설게 공격을 해대도 의 실험복과 데이터의 소수점들이 나로 하여금 시간을 잊게 했다. 이 때부터, 난 '실험의 여왕'이라고 불려졌다. 선택의 첫 발자국이 여기 이곳에서 끈기와 결의로 다져져 갔다.

 집 주방 이상으로  매일 차리고 치우는 반복된 업무속에서 위험과 고생을 감수한 것을 이유로 삼는다면... 지역마다의 하수를 뜨던 초심이 첫 발자국이었다면... 도랑과 개울물을 만난 때였겠다. 내가 탁자의 사수가 되어 차리는 실험을 어떻게 하면 신입들과 즐겁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방법은 왜 안될까? 시간이 지날수록 시행착오가 주는 지혜를 후배들과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위험과 고생은 강물이 바다로 향하듯 더 큰 기회와 선택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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