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극이 끝난 후

책이 극이 되는 시간

by 빛작

3년 전의 여행을 떠올렸다. 트로피칼 비치 파도풀의 파도가 캐럴 소리와 함께 밀려왔다. 파도에 몸을 실어 올리려면 뛰어올라야 했다. 따귀처럼 등을 때리는 키보다 높은 파고쯤은 목표도 아니었다. 역경도 아니거니와, 무릅써야 할 콧물과 찰나의 침수는 문제 되지 않았다. 겁도 두려움도 무릎 꿇던 순간이었다.


맞서면 된다. 못해보고 아쉬운 것보다 백만 배는 낫다. 하지 않았더라면 아쉬웠을 경험은 아마도 나만의 자원이 될 거라고 믿는다.


나의 인생에 한차례 큰 파도가 몰아쳤던 푸른 용의 해, 25년도는 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아야 할 중대한 이유를 마주했던 해였다.


2025년 1월 18일, 위대한 시간 1.

엄마의 유산 (김주원, 2024, 건율원)을 읽고 자녀에게 정신을 남길 편지를 쓰고자 하는 엄마들이 모였다.

그로부터 2026년 1월 사이에는 많은 시작과 결과가 있었다. 특별히 선택했다기보다 바닷물처럼 지금 여기까지 흘러왔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그 '시작'을 지금 생각해 보면 뛰기 직전 도약판을 구를 때처럼 정신이 북돋아졌던 시점이었다. 새벽독서를 통해 챙기지 못한 인문학이라는 한 계절을 지내고, 살아온 날들에서 새로운 날들로의 전이를 지나고 있었기에, 저마다의 연결고리가 지속적으로 알을 까는 듯했다.


2025년 7월 30일, 엄마의 유산 2,3 : 네가 바로 블랙스완이야, 우주의 핵은 네 안에 있어 출간

2025년 8월 23일, 위대한 시간 2

2025년 12월 5일, 엄마의 유산 4,5 : 살아버리는 힘 살아 벌이는 짓, 너 살아있니? 출간


무엇보다도 책이 극이 되는 사건은 '위대한 시간 3'을 앞둔 어느 날, 연극 연출가의 제의가 들어온 뒤였다.


작가들은 누구도 거절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곧 각색팀, 영상팀, 디자인팀, 기획팀을 구성했고, 아홉 명의 작가는 엄마의 유산에 쓴 글을 각색하기 시작했다. 편지극 '아이야' 무대를 위해서 글에 어울리는 음악을 정했고, 1월 3일부터 딱 2주 동안 매일 2시부터 두어 시간을 낭독에 몰입했다.


큰 꿈을 물어다 준 마달풍 연출가는 발음과 호흡에 관한 정밀하면서도 현실적인 피드백을 주었다. '잘 읽으셨스-읍니다'라는 말뜻은 감동 없이 글자를 읽었다는 표현이었으니, 작가들은 구어체를 더 편안하게 체화해야 했다.


우리는 사방에 전면거울을 갖춘 연기연습실에 모여 편지를 읽어갔다. 혜화역 근처 '불'극단 연습실에 가서는 연출가와 함께 자세와 동선을 익히면서 리허설도 했다. 분명하고 확실한 건 진솔함과 감동을 무조건 표현해야 하는 거였다.


생각할 건 오직 연습뿐이었다. 아홉 명에 하루의 리듬은 오직 낭독 중심으로 흘러갔다. 나 또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잠들기 전 누워서, 거실에 거울 앞에서 혼잣말로 '아이야'를 외워나갔다. 목표는 관객보다 덜 울기로 하고 말이 명확하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고 있었다.



마달풍 연출가와 지담작가, 대마왕작가는 언론사홍보와 소극장 섭외, 포스터를 붙이러 발로 뛰어다녔다. 엄마의 유산에 들어가는 모든 디자인을 맡아준 근아작가는 티켓과 작가들의 사진을 넣은 근사한 포스터를 제작하였다. 낭독에 참여하지 않는 작가들은 연습실에 찾아와 응원간식과 피드백을 주었다. 빠듯한 일정에도 방송용 큐시트와 리플릿, 행사 일정과 역할분담을 짜는 것으로 모두의 손발이 편지극을 향했다. 국내 최초 기획되는 편지극이고 초연에 오르는 작가 한 사람으로 더욱 설레고 의미가 컸다.


2026년 1월 17일, 위대한 시간 3

동숭무대소극장에 새벽독서 작가들과 연출가, 조명과 음향스텝이 모였다. 아침 일곱 시부터 10시 첫 공연이 시작되기 전, 세 시간 동안 우리는 배우 같았다. 핀조명이 혼합된 무대에서 어제와는 다르게 심장이 뛰고 있었고, 우리의 꿈이 나란하고 뜨겁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팀의 낭독은 연습의 결과라기보다 잠재된 달란트를 꺼내는 기회였다. 엄마의 정신이라는 진심이 관객에게 전해지는 동안 음악과 눈물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가족, 친구, 동료, 동기들은 참 한 손님으로 느껴졌다. 블라썸도윤작가님을 깜짝 영접하고는 감동이 열배가 되기도 했다.


청년들에게 엄마들에게 우리의 뜻이 전해지는 순간순간들은 전기게임처럼 서로에게 통하는 듯했다. '뜻'이라는 씨앗이 속속 박힌 아름다운 무대 위에서 작가들의 미소도 물결처럼 잔잔해가고 있었다. 작가들의 낭독을 들으면서 처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관객들이 벅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는 동안 나는 그 소리에 더 뭉클해져서 눈물을 참아내야 했다. 과정의 힘을 배우게 된 이 자리에 오기까지 작가들과의 연습 시간이 떠올랐다. 조건이나 결과에 연연하기보다 큰 의미는 한 사람 한 사람 편지극을 꿈의 한 부분매듭짓는 것이겠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낭독을 했던 내 속에는 스물일곱의 내가 단단히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마주 오는 파도에 맞서지 않았더라면 내 꿈은 벌써 증발해 버렸을 거야' 하고 말이다. 삶의 나이테가 멈춰버리지 않도록 글을 쓰고 있음을 감사히겼다. 새로움과 두려움은 결코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고 '맞서는' 한 해가 되어보기로 결심했다. 이제, 봄에 피어날 엄마의 유산 6을 기다리고 있다.


06화 스물일곱의 내가 된다


* 엄마의 유산, 2025, 건율원

[빛작 연재]

월 [100일의 보통의 날들]

화 [빛나는 문장들]

수 [자연이 너그러울 때 우리는 풍요롭다]

목 [빛나는 문장들]

금 [100일의 보통의 날들]

토 [아미엘과 함께 쓰는 일기]

일 [100일의 보통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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