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서리 Nov 12. 2024

영창

정순녀



이제 곧 정오에 가까워지는데도 방은 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두웠다. 다행인 건 한옥이라서인지 여름이 시작되는 계절이 되어도 벽에 습기가 많이 슬지 않았다. 어두운 것만 빼면 나름 크게 잘 빠진 방이다.


긴 벽으로는 낡은 텔레비전과 자개가 들어간 제법 새것 느낌이 나는 앉은뱅이 화장대가 놓였다.


이사오면서 다 팔고 남은 돈으로 구입한 것이다.


“알았어. 알았어. 오늘 밤에 같이 만나보면 되는 거 아냐. 거기서 봐.”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정순녀는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주황빛이 많이 들어간 색이다. 선을 따라 섬세하게 그린 후 몇 번 입술을 마주 붙여 정리하고 나서 이리저리 거울 안의 자신을 둘러봤다.


김과장이 좋아하는 색이라고 했던가. 주홍빛 립스틱은 그녀의 얼굴 톤에 썩 잘 어울렸다.


김과장, 그는 말간 얼굴에 머리가 좀 벗겨졌지만, 이리저리 구슬리면 보험 계약 하나는 해결해 줄만 한 위인이다. 너무 짓궂게 나오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라면서도 정순녀는 거울 속의 제모습을 꼼꼼하게 살폈다.


옷을 차려입고 넓게 빠진 마루의 한쪽을 바라봤다. 개다리소반에 반찬은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시디신 김치 쪽과 며칠은 된 것 같은 청양고추가 말라서 상 위에 놓였다. 그 옆으로 된장 그릇도 있다. 멸치도 볶아뒀다. 멸치는 주로 애들의 먹거리였다. 눈길은 잠깐 밥솥으로 향했다.


밥은 해뒀었으니 알아서 먹겠지.


사실 밥을 해둔 게 그제인지 그 전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한꺼번에 꽤 많은 양을 했으니 아직 남아있겠거니 싶을 뿐이다. 밥솥을 열어보기에 시간이 빠듯했다.


토방에 내려서서 하얀 하이힐을 꺼내 신었다. 잘 걸친 투피스는 저번 월급에 샀더랬다. 아무래도 거래처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하니 외양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약간 술기운이 돌았다. 김과장은 계약을 해줄 듯 말 듯 굴었다. 세상의 모든 사내가 다 똑같지. 별 수 있겠나. 몇 군데나 더듬었더라. 씨발 새끼. 더듬은 값은 내라지.


송준태가 영창에 들어간 지 한 달 남짓한 시간이었다. 보험 계약량을 달성해야 번번한 월급이 나올 테고 아이들을 먹일 터다.


일을 계속하려면 옷도 사야 하고 화장품도 유지해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과 메이커도 잘 알아둬야 했다.


깜깜한 마루 위로 노란색 전구에 불을 켰다. 털썩 마루 끝에 걸터앉으니, 아침에 밀어둔 밥상이 눈에 띈다. 여전히 밥그릇은 비어있는 채고 마른 멸치 반찬은 오다가다 다 먹었는지 없었다. 아무리 시어빠진 김치밖에는 없다고는 해도 지들 입맛에 맞는 것만 먹는다.


“어, 어, 안돼. 안돼. 여기서 싸면 안 되는데.”


큰딸 송화분의 다급한 음성이 들리고 이어서 막내 송화철의 울음소리가 터진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정순녀가 장지문을 벌컥 열었다. 한순간에 구린내가 푹 풍긴다.


“이게 무슨 일이얏!”


단박에 다정하지 않은 말투가 쏟아진다.


“저녁에… 저녁에….”


딸아이의 울먹이는 소리가 정순녀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이불 위가 난장이다. 설사를 뿌린 것인데 옷을 내리던 중이었는지 이불로 죄다 똥물이 튀었다.


당장 이 구린내를 어떻게 잡을 것이며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데 이불 빨래부터 하게 생겼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송화철의 옷을 죄다 벗기다 말고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내리친 후 장지문 밖으로 세웠다.


“엄마. 엄마….”

“내 인생을 잡아먹을 것들. 저리 가. 나가.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버렷.”


엄마, 엄마 하는 아들의 목소리에도 분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자다 일어난 것도 아닌데 작은딸은 뚱한 얼굴로 작은방으로 얼른 숨는다. 보통 때는 눈치가 빠르지 않은데 이럴 땐 약삭빠르다. 아들은 벽 한구석에 서서 계속 울기만 한다.

귀가 따갑다. 한밤중인데 동네에서 또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을 거다.


아들은 이제 5살이다. 5살이면 똥오줌은 가려야 하는 거다. 아들이라고 유독 뒤를 봐줘서 이런 거니, 오늘만큼은 단단히 혼을 내는 게 맞다.


정순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파리채를 집어 들었다. 찰싹찰싹, 피멍은 좀 들겠지만 뼈는 부러지지 않을 거다.


“바비… 흑흑 바비… 없어서… 된장만… 머…었어.”


큰딸 송화분이 울며 말리고 드는데 뭐라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일단 아들을 마당 끝의 대문 옆까지 쫓아내곤 이불을 걷어 마당에 던졌다. 밤새 빨래를 빨고 나면 내일 또 아침에 출근해야 한다. 송화분은 집안일을 잘하지 못한다. 너무 곱게 키웠다. 다른 집처럼 설거지도 시키고 밥 앉히는 것도 가르쳤어야 했다. 후회가 밀려든다. 애당초 송화분이 아니었더라면 송준태와 결혼도 안 했을 거다.


송화분은 칠삭으로 태어나서 친정에서 고이고이 키웠다. 한여름으로 접어들던 시기에 태어나 방에 불을 때느라 가족들은 땀띠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공주님처럼 키웠더니 할 줄 아는 게 없다.


공부만 잘하면 다야?


하루 만에 문제집 한 권을 다 풀었다며 칭찬받으려고 왔던 표정에 애를 밀어버렸다. 그 문제집 한 권 사려고 내가 밖에서 무슨 수모를 겪고 다니는 줄 알아?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아들을 데려다 찬물로 씻긴 후 이불 빨래를 시작했다.


망할 년의 팔자. 서방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꼴인지. 영창에 들어갈 주제도 모르고 바람을 폈어. 영창 들어간 새끼 뒷바라지를 왜 내가 해? 그년더러 하래. 그년더러. 내가 이렇게 살아보겠다고 지랄발광을 해대며 일을 하는데 개새끼.


송준태를 향해 욕을 중얼거리며 유독 냄새가 심한 곳을 방망이로 마구 두들겼다.


겨우 이불을 빨아 널고 지친 몸을 해서 방에 들어섰다. 아이들은 울다가 잠이 들었는지 이불도 깔지 않은 채였다.


얼른 단스에서 팬티를 꺼내어 아들에게 입혔다. 파리채 자국이 여기저기 남았다. 안티프라민을 꺼내서 아들의 피멍 자국에 발랐다.


정순녀의 손이 바르르 떨린다. 이 꼴로 살려고. 무슨 덕을 보려고.


자식새끼가 뭐라고. 내가 이러고 살아.


눈물이 떨어진다. 팔로 눈물을 쓱쓱 닦는다.


결국 아이들을 이불 위로 굴려서 눕게 한 정순녀는 한참을 아이들만 바라봤다.


나쁜 새끼. 중얼거린다. 술이 다 깨도 송준태가 나쁜 놈인 건 변하지 않는다. 세상에 죽일 놈.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다. 어디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어보라지.


벌개진 눈가를 닦은 정순녀가 벌떡 일어나 뒷방으로 향했다. 거기에 저번에 먹던 소주가 남았다. 김치 한 젓가락에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정순녀는 수화기를 들었다.


“어디야?”


같이 보험을 하는 친구다. 그녀는 혼자 된지 좀 돼서 늘 시간이 많았다.


“나가자. 가서 춤이라도 춰야겠어. 자식새끼 다 소용없어. 너무 힘들다. 가서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좀 추다 오지. 뭐.”


수화기를 든 채로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다듬었다.


“그 사람? 저번에 그? 그 사람들하고 연락을 주고 받았어?”


갑자기 흥미로워진 덕에 입술 끝이 실룩였다.


“나야 별 관심 없지. 그래도 너는 만나야 할 거 아녀.”


이제 입술도 다시 칠한다. 이번에는 진분홍빛이다. 철쭉같은 입술 색에 다시 볼에 분도 바른다.


옷을 입고 나서는데 큰딸이 부스스 일어난다.


“엄마 어디가?”

“엄마 친구 만나러 가.”

“엄마 밥 없어요.”

“뭐?”

“밥이 없어서… 화철이 배탈 난 거야.”


숨이 딱 멎으면서 짜증이 치민다. 늦게까지 놀지도 못하겠다. 밥이 없으면 스스로 해먹을 줄도 알아야지. 다음에는 꼭 단속을 해야겠다. 이제 밥도 좀 할 줄 아는 나이여야 한다고.


“알았어.”

“아침밥 뭐 먹어?”

“아침에 일찍 와서 밥 해둘게. 얼른 자.”


바깥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가로등도 꺼지고 없는 시간. 오직 별빛만이 빛났다.


시멘트 바닥 위로 또각또각 정순녀의 하이힐 소리가 울렸다.




*영창(營倉)은 원래 군대에서 쓰던 감옥을 일컫던 말인데, 흔하게들 감옥 이라는 말 대신 쓴 시기가 있습니다. 

** 이번주만 매일 연재하려고 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