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왼쪽에 있던 양성종양이 악성으로 변했습니다.”
그게 두번째 시작이었다.
김영희는 전부터 그게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면서, 왜 혹을 제거하지 않았느냐고 탓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와 탓하면 뭐해. 치료 잘 받아야지. 했다.
수술의 과정은 이미 겪은 바가 있으니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의 눈길이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수술 전 날, 레지던트가 자신을 불러 수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한다고 했다. 위치와 절개방법을 확인 한 후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모르셔서들 그렇지, 유방암은 10명중 3명 꼴로 다른 쪽 가슴에 암이 나타나니 그렇게 운이 나쁘신 건 아닙니다.]
화분은 그말을 듣는 순간 어깨가 들썩일만큼 움찔했다. 병실로 돌아와서도 그의 말이 계속 따라다녔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역시 그 말이 맞았다. 점점 마음 한쪽이 개운해졌다.
10명중 3명이면 꽤 높은 확률이다. 병동 안에 열명도 넘는 유방암 환자들이 있고, 그들 중 자신을 포함한 3명은 이미 수술을 했던 사람이라는 소리다.
관리를 못해서, 몸을 함부로 해서, 라는 힐난의 소리가 저 멀리로 날아갔다. 사실 화분 자신이 관리를 썩 잘했다고 할 수 없는 게 사실이어서 그런 소리가 들리더라도 나름의 각오는 한 상태였다.
가족들은 힐난하고 싶을 지언정, 차마 입밖으로 말을 뱉지 못했다. 일단 다시 암이라는 광야에 선 사람이었으니까.
암이라는 광야는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매번 ‘희망’을 만나지만 그건 늘 ‘신기루’였다.
송화분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 암에 무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 저 또한 암이라는 광야에 갇힌 사람이라는 걸 절절이 깨달았다. 광야에 서면 끝이 어딜지 모르겠고 하늘은 늘 무겁게 가라앉은 회색빛이다. 마음을 메마르게 하는 먼지와 돌자갈이 굴렀다. 맨발이었다. 걸음을 내딛기가 무섭고 세상에 덜렁 혼자라는 걸 분명하게 자각했다. 같은 암이라도 증세가 달랐고 기수가 달랐고 수술후의 어려움이 다르다. 암환자들은 자신이 가장 불행한 환자가 되곤 했다. 그런 사람들을 대하는 게 피곤했던 송화분은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그녀 역시 광야에 서 있는 건 특별히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이럴 때가 그랬다.
[왜 발에 주사를 맞나요?]
[두번째면 전이예요?]
[어떻게 관리했길래….]
[그 길을 어떻게 또 가나요?]
[난 3기말이래요. 그쪽은 그건 아니니까….]
어떤 이는 놀라했고 어떤 이는 안쓰러워했으며 어떤 이는 그래도 자신이 더 불행하다는 걸 강조했다.
열명 중 세명이라는 소리가 뭐라고 이렇게 안심이 될까.
화분에게는 운이라는 게 없었다. 직장에 취직했을 때, 이미 김영희는 [네 운은 다 쓴 거 같다.] 라고 했었으니까.
그러니 열명중 세명이라는 높은 확률에 당첨된 것이 그렇게 불운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
수술이 끝나고 교수는 이번 항암은 다른 걸로 해야 한다고 했다.
여전히 호르몬성도 허투 인자를 가진 유전성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저번 암과 다른 신생암이라고도 했다. 성질이 조금 더 못되어 졌다던가.
여섯 번의 항암을 하는 대신 머리가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정확히는 완전한 민머리는 안된다는 의미였다. 1/2에서 1/3은 머리가 남고 부작용도 대부분 훨씬 적다고 했다.
송화분은 그제야 지난 번 항암이 혀를 얼마나 마비시켰고, 미슥거리고 힘들었는지 상기했다. 그때보다 괜찮다면이야…. 암의 성질은 못되어졌다고는 하지만 견딜만 하다니 마음을 놓고 가도 된다고 생각하니 그또한 한결 편하고 좋았다.
4년전에는 항암때 호중구 수치가 간당간당했어도 열이 난 적도 없었으니 이번에는 더욱 수월하리라.
그러나 CMF라 불리는 항암은 송화분에게 의외의 복병이었다. 천천히 미각을 잃는 건 당연하고 울렁증이 심했다. 밥이라고는 김영희가 만들어주는 우엉을 넣은 된장죽밖에 먹을 수 없었다. 그것도 2차 때까지만이었다. 3차 항암이 시작되자 김영희는 정말 한솥 가득 우엉된장죽을 끓였다. 그러나 화분은 한번 밖에 먹을 수가 없었다. 미음과 다를 바 없는 누룽지를 조금씩 마시고 영양음료로 끼니를 대신했다.
4차때는 기어이 속이 뒤집어졌다. 못먹을 것을 대비해 항암하기 전에 엄청 먹었던 게 탈이 났다. 송준태의 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면서 급하게 문을 열고 밖에 구토도 했다. 하필 그 도로 바로 앞에 있던 주택의 주인이 나와 삿대질 하면서 욕을 해댔다.
화분은 그걸 설명할 기력조차 남지 않았으므로 쏟아지는 욕을 그대로 받으며 죄송하다고 할 뿐이었다.
[치우고 가시오. 얼른 치우고 가!]
기어이 송준태가 차에서 내렸다.
“딸이 항암을 하고 와서 지금 실려가는 판입니다. 여기를 더럽힌 건 너무 죄송하지만 사정 좀 봐 주시죠.”
*
방사 치료가 시작되었다.
방사선 치료 기사님들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는 게 어느덧 다시 익숙해졌다. 화분은 40줄에 드니 더욱 뻔뻔해졌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기도 했다.
이럴 땐 예쁘지 않아서 다행이지. 날 치료하는 물건으로 보면 봤지. 여성으로 보지 않을 테니.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여유로워졌다. 저번에도 방사는 큰 문제가 없었으니 당연히 그럴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몸이 힘들어졌다.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송화분 님 괜찮으세요?]
간호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식사는 규칙적으로 하시나요?]
[식욕이 별로 없어요.]
사실 그들의 말도 귀찮을 지경이긴 했다.
[단백질도 충분히 섭취하셔야 해요.]
입맛이 딱히 있지 않았음에도 몸은 늘 부은 상태였다. 항암 후유증인지 부기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더구나 문제는 방사 부위에 화상이 심해진 거였다.
[오늘 치료 후에 교수님 봬시고 가라시네요.]
교수는 화분에게 이 상태라면 방사를 더는 진행할 수 없다는 얘기를 전했다. 화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방사로 인한 화상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교수 협의회에서 치료 방향을 고민하겠습니다만, 이렇게 계속 갈 경우 그만 둘 수 있다는 건 알고 계세요.]
마지막 집중 치료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껏 치료와는 다르게 집중치료는 방사 강도를 높여서 치료하는 것이니만큼 지금보다 더 상처가 험악해질 수 있을 터였다.
[명절이 일주일입니다. 명절 기간 동안 치료를 쉬니 그 동안 상처를 말리는 데 최선을 다하셔야 합니다.]
<상처를 말린다.>리는 건 식염수를 거즈에 묻혀 상처에 올려두는 걸 말했다. 십분씩 세번이면 삼십분씩 붙였다 뗀 뒤, 연고를 바르는 걸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누어 꼬박꼬박 해야 했다.
그걸 열흘 가까이 하고 나니, 상처는 꽤 아물기 시작했다. 교수는 다행이라면서 환하게 웃으며 이후 일정을 다 진행했다.
그러부터 한달 후, 3개월 정기 검사에서 화분은 교수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교수가 전화를 하는 건 결단코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더구나 화분의 몸은 이상했다. 식욕이 없는데 살이쪘고, 생리가 멈추지 않았으며, 몸이 땅 밑으로 꺼질 것처럼 무거워졌다. 세상의 모든 게 다 무너질 것처럼 균열이 가는 느낌이었다.
“몸… 괜찮나요?”
교수의 첫마디였다. 화분은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올 것이 왔다는 게 이런 것일까? 이번엔 유방 검사를 하지 않았음에도 피검사 만으로도 암수치가 높게 나온 것일 게 틀림없었다.
“많이 힘들어요.”
“일단 병원으로 당장 오세요.”
“…….”
차마 암수치의 문제냐고 물어야 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암…인건가요?”
이번엔 교수 쪽에서 말이 없었다. 대신 한숨이 나왔다.
“암 아닙니다. 하지만 죽을 수도 있어요. 당장 오세요.”
빠르게 조퇴를 내고 교수 앞에 앉았을 때 교수는 한심한 듯 화분을 바라봤다.
“보통 몸이 이렇게 힘들면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합니다.”
“네?”
“어떻게 힘들었어요?”
교수의 말에 화분은 이제까지의 몸상태를 상세하게 늘어놓았다.
“이미 말의 속도도 꽤 느려졌는데… 주변에서 아무 말 안해요?”
교수의 결론은 갑상선 저하증이라는 거였다. 저하증의 수치가 11-21까지 정상범위라는 걸 설명했고 화분은 그 수치가 1도 채 나오지 않았음도 전했다.
“길을 걷다 픽 쓰러져서 그대로 죽어도 너무 타당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화분은 안심했다. 암이 아니었다. 이미 3대 7의 확률인 3기에서도 빠져나왔고, 이번에도 죽음에서 빠져나왔다. 단순히 항암 후 몸 상태가 나빠진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던 게 갑상선에 이상을 일으켰던 거였다.
생각보다 죽음은 가까이 있었다. 담당교수는 진심으로 화를 냈지만, 화분은 그것만으로도 꽤 가뿐했다. 또 한번의 죽음에서 어떡하든 빠져나왔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그런 만큼 절망이 깊을 필요도 없다.
두번째 암에 대해서 어렴풋하게 이유를 결론지었다. 올케인 강수현에 대해서 자꾸만 떠올렸다. 누군갈 원망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데, 원망의 마음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고 용서란 떠올릴 수 없는 단어였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 아무리 손목을 그어도 깊이 그을 수 없다는 걸 열 여덟, 그때 알았다. 신 앞에 엎드려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도 빌었다.
신을 떠나면서 죽음을 외면했다. 신이 허락하지 않은 죽음을, 어떡하든 살아내야 하는 삶을 택해야 한다면 누구보다 자신이 택하는 삶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갑상선 저하증이라는 사소한 병이 죽음의 문턱까지 자신을 이끌었을 때, 화분은 문득 신을 떠올렸다.
자신이 떠나온 곳이 너무 멀었나. 그럼에도 신은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때부터였을까? 화분은 돌아가야 하는 걸 깨닫고 말았다. 누군가를 용서해야만 살 수 있고 자신이 용서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신은 용서의 길로 들어서게 해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