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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서리 Dec 03. 2024

이혼

2. 송화란

화란은 할머니가 사는 마을로 이사를 간 게 즐거웠다. 할머니는 성질이 고약하긴 했지만 어지간해서는 공부하라고 야단을 치지 않았다. 


다만 밥시간은 잘 지켜야 했다. 밥시간이 됐는데도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할머니는 성질이 부렸다. 저녁을 먹고 나면 밖에 나가는 일은 안 됐다. 그럼 꼼짝없이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숙제를 하기도 했다. 숙제는 주로 화분이 시켰다. 


그럴 때면 화란은 퍽 지루했다. 물론 더 지루한 건 화분처럼 보였다. 전에 살던 집에는 책이 많았는데 이제 책이 없으니 화분은, 읽던 책을 읽고 또 읽고 반복했다. 가끔 공기놀이도 했다. 화란은 화분에게는 속임수가 잘 통하지 않고 지기만 하는 게 화가 났다. 


할머니네 동네는 놀 곳이 많았다. 뒤쪽으로는 산이 있었고 골목골목을 쏘다니면서 흙장난하는 것도 괜찮았다. 더구나 화란과 잘 어울려주는 송은정을 비롯한 사촌들도 있었다. 송은정의 동생 은하와 동갑내기 남자인 송은규가 같이 어울렸다. 그들은 고무줄도 잘하고, 달리기도 잘했다. 같이 몰려다니며 냇가에서 물장난을 치기도 했고 돌멩이랑 황토 흙을 모아다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하루가 금방 지났다. 엄마랑 뽕나무집에 살던 때보다 훨씬 재미있는 하루하루였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졌다는 걸 알긴 했지만, 그게 큰 체감을 불러오지 않았다.

아빠를 좀 더 자주 볼 수 있게 되는 대신 엄마와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외에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이삼일에 한 번씩 남매들을 보러 왔다.


그러다 한 사람도 같이 왔다. 말라깽이였지만 자신과는 다르게 눈에 쌍꺼풀이 있는 예쁜 여자였다. 할머니는 그 여자가 업고 있는 아이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앞으로는 새엄마라 불러라.”


새엄마는 예뻤다. 얼굴은 하얗고 가슴은 풍만했으며 다리는 길었다. 옷차림은 엄마에 비해서 영 보잘것없었지만 뭘 입어도 옷이 단정하고 고와 보였다. 


화분은 그 사람을 볼 때 은근히 얼굴이 어두워지곤 했다. 대신 여자의 아이를 예뻐했다. 아기의 이름은 송화웅이라고 했다. 


“화웅이가 이제부턴 막냇동생이야.”


할머니는 화웅이 오면 화란을 잘 챙겨주지 않았다. 보통 때는 화란의 밥그릇에 반찬을 올려주곤 했는데 화웅이 오는 날은 알아서 밥을 먹어야 했다. 화웅이 밉거나 한 건 아니었다. 아기는 엄청 귀엽게 생겼고 사진에서 보던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어느 정도 비슷하기까지 해서 동생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새엄마.”


라고 부르니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녀의 이름이 김영희인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학교에 가는 길은 꽤 멀어졌다. 한 시간을 넘게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다. 다리가 아픈 건 둘째치고 아침엔 화분과 함께 걸어야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화란은 학교 가는 길에 봐야 할 게 너무 많은데, 화분은 앞만 보고 걸었다.


학교가 즐거운 것도 아니었다. 너무 멀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학교 친구들이 썩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 동급생 아이들이 놀아주지 않게 된 건 꽤 된 일이었다. 1학년 때까지만 해도 화란은 공주님처럼 차려입고 다니던 걸로 유명했다. 공부는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옷을 입혀놓으면 그럭저럭 잘 소화해 내는 체질을 가졌다. 

그러나 2학년이 되자 상황이 많이 변했다. 무릎을 동그랗게 기운 옷을 매일 입게 되었고 일주일 내내 한 벌 옷으로 버틸 때도 많아졌다. 팔꿈치와 오금에는 새까만 때가 지워지지 않기 시작했다. 


사실 화란에게도 예쁜 머리핀이 있고, 잘 지워지는 지우개가 있다면 친구들은 화란을 무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날, 친구의 지우개를 가져와 버렸다. 지우개를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친구들에게 있는 자잘한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화란의 가방 안에는 운동장에서 주운 예쁜 돌부터 친구들의 연필, 지우개, 머리핀 등이 들어찼다.


*


화란은 일곱 살 때부터 이미 남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새 아파트에 이사 간 지 얼마 안 되서였다. 유치원에 갔다 돌아오면 저녁까지는 늘 신나게 놀곤 했다. 하지만 아파트에 같이 놀만한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그러다 건너편 동에 사는 고등학생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화란을 귀여워해서 종종 놀아주곤 했다. 오빠는 착해서 화란을 안아주는 일도 많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일도 잦았다. 놀이터에서도 그네를 태워줬고, 같이 뱅뱅이도 탔다. 


옥상에 올라간 건 오빠를 따라서였다. 


거기에서 오빠는 화란의 옷을 벗겼고, 맨살을 만졌다. 화란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오빠가 다른 방법으로 놀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빠가 만질 때마다 무서움도 일어났지만,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아팠다. 뜨거운 것이 몸을 갈랐다. 하늘은 흐렸다. 당장이라도 번개가 칠 것만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파요.”


눈물이 났다. 너무 아팠다. 


“소리 지르면 때릴 거야.”


한 번도 윽박지르지 않았던 오빠가 오늘은 엄마 아빠가 싸울 때처럼 화를 냈다.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것보다 지금이 더 무서웠다. 화란은 두려움에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입술을 깨물었다. 보통은 입술을 빠는 게 화란의 버릇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입술을 꾹 깨물어 피가 났다. 덜덜 떨리는 중에도 아픈 건 어쩌지 못했다. 


"이건 우리 비밀이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말하면 너랑은 이제 절대 놀지 않을 거야."


화란이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오빠는 사라지고 없었다. 팬티를 입고 옥상에서 내려가려 일어섰다. 다리 사이가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화란의 집은 1층이었고 집안에 들어온 화란은 컴컴하고 어두운 방으로 숨었다. 집에는 다행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화란은 깜박 잠이 들었다. 불이 켜지고 화분이 들어왔다. 


“울었어?”


화분이 가까이서 화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화란은 말없이 입술을 쭉쭉 빨았다. 


“아파.”


화분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뭐?”

“아프다고.”

“어디?”


화분이 화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난다.”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홉 살인 화분은 어른스럽다고 늘 어른들께 칭찬받았다. 화란을 눕힌 화분은 물에 적신 수건을 화란의 이마에 얹었다. 


“이제 열 내려갈 거야.”

“피났어.”


화란은 조그맣게 말했다. 


“어디?”


아래쪽을 가리켰는데 화분이 치마를 들추어 피가 난 곳을 찾았다. 무릎과 정강이가 죄다 까져 있었다. 화분은 빨간약을 가져다 거기에 약을 발랐다. 


“넘어졌어?”

“몰라.”

“일단 자. 아프면 또 말하고. 엄마 전화 오면 약 사 오라고 말할게.”


무릎이 아팠는지도 몰랐다. 피가 나는 건 거기만 있는 게 아닌데. 언니한테 말할까 하던 화란은 절대 말하지 말라던 무서웠던 오빠를 기억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몰랐다. 배 속이 아팠고 지금도 아픈데 그걸 말하면 안 될지도 몰랐다. 화분은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화란과 잘 놀지 않았다. 매일 집에서 책을 읽었다. 그래서 화분에게 말하지 못했다. 화분이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같이 놀아줄 리가 없었다. 


엄마는 회사에 다닌다고 바빴고, 화철이 먼저였다. 아빠는 사장님이라고 했는데 몹시 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결국 화란은 누구에게도 그날의 일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냥 한동안 밖을 나가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언니 화분 곁에서 종이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오빠를 마주칠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어쩌다 밖에 나가도,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오빠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 옥상 이후 오빠는 사라졌다. 


어느 날, 비디오 플레이어에 꽂힌 걸 그대로 넣고 보게 되었다. 안에서는 벌거벗은 여자와 남자가 뒤엉켰다. 화란은 그 움직임이 자신이 옥상에서 겪은 일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때 화분이 나타나 비디오를 서둘러 껐다. 


“어린애들은 이런 거 보는 거 아냐.”

“어른들은 다 보는 건데?”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 어린애잖아.”

“어른들은 다 저런 걸 하는 거지?”


화분은 뭔 그런 걸 묻냐는 표정으로 화란을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탁 하고 때렸다. 


“입술 깨물지 마.”

“왜 때려!”


갑자기 서운하고 답답해진 화란은 꽥 소리를 질렀다. 화분은 화란이 성질을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엄한 표정이 되었다. 


“왜 소리 질러!”

“언니가 때렸잖아.”


화란은 신경질을 부렸고, 울었다. 엉엉 울었다. 발을 걷어차고 그 자리에서 뒹굴었다. 


“그만 울어! 계속 울면 때린다.”


화분은 아무것도 몰랐다. 얼마나 아팠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화분은 자꾸만 화란을 나쁜 아이처럼 말했다. 


자신은 어른들이 하는 걸 한 건데, 언니는 그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송화분이 미웠다. 아무도 화란을 지켜봐 주지 않았다. 


*


“학교 가기 싫어!”


학교를 오 분 남짓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화란은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앞서가던 화분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그리곤 돌아와 화란을 질질 끌고 학교로 향하기 시작했다. 


화란은 늘 학교가 싫었다. 학교에 가면 자신은 미움을 받는 게 너무 느껴졌다. 송화분은 어릴 적에도 몰랐고 지금도 몰랐다. 화란은 그게 제일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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