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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Jan 30. 2021

나를 찾아서-3

나의 두드러진 심리코드 셋

나의 두드러진 심리코드 세 번째는 주의 초점이 넓다는 것이다. 

관심을 두고 흥미롭게 바라보는 분야가 다양할뿐더러 모험심을 갖고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유용한 단서를 놓치지 않는 예민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소소한 자극을 쉽게 흘려보내지 못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정신적으로 쉽게 소진될 수 있다.

또한 생각이 한 가지 결론을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서로 경주하듯 다투어 떠올라 산만해지고 사실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말하자면 피곤한 특성이로군요.

세 번째 코드야 말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동시에 미치게 하는 특성이 되시겠다. 

사실, 나에게는 재미있는 것이, 흥미로운 것이 넘쳐난다. 

낯선 여행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치고받고 싸우는 정쟁이라는 것도 (보고 있자면 짜증은 나지만) 재미있다. 

화학 작용도 흥미롭고 물리 원칙도 어떤 것은 실생활 적용이 가능해서 유용하며 신기하다. 

역사는 학창 시절에는 흥미가 없었는데 로마인이야기를 접하고 나서부터 급 좋아졌다. 

미술은 에른스트 곰브리치를 알고 더 좋아진 분야다. 

의학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동양 철학의 깊이는 알면 알수록 양파 같은 매력이 있다. 

추리소설은 또 어떻고. 

야구도 빼놓을 수 없지. 단순히 공을 던지고 치는 건데 도대체 왜 그렇게 재미있는 걸까. 미스터리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식물이 없듯 세상은 재밌는 것들로 넘쳐난다

이러니 책을 읽어도 한 가지 분야를 탐독하게 되지는 않는다. 잡식이다. 출퇴근용과 침대용으로 나눠서 읽는다. 출퇴근용은 그래도 최대한 업무에 도움이 되는(추리소설이? 응?) 다소 딱딱한 것들을 읽고 침대용은 될 수 있으면 말랑한 소설과 에세이류로 하고 있다.


모험심도 강하다. 아니 '모험심이 강하다' 보다는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길도 같은 길보다는 다른 길, 경험도 맨날 하는 것 말고 다른 것, 안 해 보던 것을 한 날이 더 기분이 좋고 보람 있다고 느낀다. 누군가 부탁을 해오면 (물론 나는 바리깡이 처음이라 밝히고 결과에 절대 클레임 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 놓고) 바리깡으로 머리카락 자르기에도 선선히 응한다.(근데 해보고 놀랐다. 외출에 문제가 없이 잘라진 것이다!) 

전기드릴을 처음 쓴 것도 우리 집이 아닌 친구 집의 커튼 달기에서였다.(미안하게도 이 집은 나 혼자 다 할 수는 없었고 나중에 방 한 개는 다른 분이 완성했다지?)

카드놀이도 밤샐 정도로 재밌는데......

나는 관찰력이 좋았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차가 흔들리면 지면을 살폈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뭘 보고 있으면 좋든 싫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입력될 수밖에 없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유리창에 반사되어 보이는 것으로 상대의 모니터에 뭐가 있는지 알게 되는 일도 있었고 컬러링으로 전화한 사람을 특정하기도 했다. 음, 추리소설을 많이 읽으면서 이런 추론 능력이 더 배가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추리소설 예찬론자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그럴 수도 있으나) 추리소설은 상당히 유용하다. 

추리소설을 읽으면 일단 인간의 모티브, 동기를 이해하는 능력이 좋아진다. 

이는 사회생활의 기본 능력의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 결국 사회생활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에도 누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로 이득을 얻게 되는 지를 생각해보면 의외로 헛소동의 주동자가 누구 인지도 쉽게 밝혀진다. 

과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나는 추리소설이 회사 생활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인간 심리를 이해하는데 이보다 더 적나라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다.


추리소설 얘기는 그만하고 그래서 나는 항상 피곤한지도 모른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단서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고 가능성을 생각하다 보면 여기서 진단한 것처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 보니 결론이 한 가지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단점으로 치닫는다.

생각은 많은데 항상 산만하다. 그래서 내 책상 위도 마치 전쟁터 같다.

그래서 내 자리를, 내 책상을 처음 본 사람은

“무슨 일 있어요?”

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 나에게는 가장 편안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의 책상은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을 위로 삼고 있다. 

그래 나는, 정리가 안 되는 사람이 아니고 극도로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이다……

우르주스 베얼리처럼 정리는 못해요.(from demilked.com)

관심이 넓고 예민해 정신적으로 쉽게 피로해질 수 있는 나는 이런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하나, 감정적 동요가 심해지거나 예민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질 때 ‘내가 스트레스가 많은 것은 아닌지’ 자신의 마음을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 맞다. 세상을 살다 보면 수학 문제처럼 ‘0, 1’ 이런 식의 똑떨어지는 답은 의외로, 아니 거의 없다.

모든 것은 여러 가능성을 상정하고 그중에서 나의 기준에서 가장 좋을 것을 선택하는, 선택의 연속이다. 

회사 생활도 그렇고 사생활도 그렇다. 한 가지를 결정할 때에도 이런 가능성, 저런 가능성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생각하니까 나는 그 과정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아, 한 번만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냥 내 멋대로 결정해버려야겠다. 왜냐! 나는 소중하니까;

둘,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마음속 깊이 초조하거나 불안정한 느낌이 들 수 있다. 어디에도 마음을 두기 어렵다.

: 나는 감정의 동요가 적은 사람이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포커페이스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항상 비슷한 감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속으로는 혼자 이 사람, 저 사람의 심정이 되어보고 그래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느라 마치 큰 저택을 혼자 청소하는 것처럼 바쁘고 초조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싱글이다. 커플도 마찬가지라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마음을 두기 어려운 것은 싱글이라는 물리적인 상태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홀로 생각해본다.(이건 또 결국 고독감과 이어지는 건가. 아 이 지긋지긋한 외로움)

너처럼 chin up 해야 할 텐데 말이야.

셋, 관심은 다양하지만, 때에 따라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바라보거나 자기감정에 지나치게 휘둘릴 수 있다.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 첫 번째 가능성과 세 번째 가능성은 결국 배타적인 거 아닌가? 싶은 합리적인 의심에 빠진다. 

관심은 다양하지만(결국 제풀에 지쳐서) 내 멋대로 결정해버릴 수 있다!(아까 결심한 것처럼) 

중용이라는 것, 중도라는 것, 적절하다는 것만큼 세상에서 어려운 것이 있을까? 

요리에서도 ‘적당히’ 넣는다는 것이 어렵고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요구하듯이 인생에 있어서도 ‘적절한 균형’이라는 것이 유지하기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적절’을 실천하며 살려고 하지만 매번 극단의 결과를 초래하며 실패를 경험한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딴 얘기인데 초등학교 2학년 때 2층 난간을 평균대 삼아서 지상 7m 높이에서 평균대 걷기를 했던 나는 얼마나 균형을 잘 잡았던 겁 없는 애송이였던가?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다쳐보지 않았기에 신체적인 아픔에 대한 두려움도, 

어렸기에 이 행동이 초래할 위험성조차도 몰랐기에, 

나는 순수하게 균형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삶도 이런 두려움을 없애거나 그 두려움에 맞서 싸우는 것의 연속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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