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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Jan 24. 2021

'나'를 찾아서-2

나의 두드러진 심리코드 둘

나의 두드러진 심리코드 두 번째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가치를 내면화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나 도덕적 당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으며 일방적이고 무거운 의무에 짓눌리지도 않는다. 

나는 나의 욕구를 사회적 책임감 같은 ‘당위 명제’에 적극적으로 일치시키려는 능동성을 가지고 있다. 

나의 역할 안에서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정의감이 강하고 윤리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다.

자신에게 특권이 주어져도 이를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엥? 굳이? 왜? 그러지는 말자.)

개인의 가치관이 사회적 당위 명제와 가까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당위 명제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회의(懷疑)에 빠지지 않고 다른 이들에 비해 심리적으로 훨씬 덜 불편해한다.

이렇게 조각의 손처럼 양 측면이 잘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

이 특성을 보면 나는 모범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 

모범적인 구성원으로서의 자질이 좋다는 의미로 한~껏 좋게 해석해보자. 

하지만, 하지만 

나는 지금 우리 사회의 가치에 동의가 잘 안된다. 

상대적으로 회사와는 그 괴리가 적으니 모범적인 조직원 정도 될 수 있으려나? 

밥벌이의 숭고함을 생각하면 참 다행이다.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나의 가치관을 사회적 당위 명제와 적극적으로 일치시키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평등이나 공정, 정의라는 것에는 관심이 많다. 

기본적인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교육과 의료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고르게 의료와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사회가 건강하게 굴러갈 수 있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육체적/정신적인 건강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민의 교육권과 의료권, 두 가지 제반 조건은 우리 사회가 지켜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생존권과 직결되는 교육과 의료시스템이 붕괴되기 시작한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현재 우리 사회가 이 두 가지를 잘 지키고 있냐고 묻는다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개천에서 용 나는 사례가 줄어드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의료 민영화에 대해서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어머 어머, 두 분 너무 완벽한 균형 아닌가요?
세상에는 돈으로만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내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공정하게 받았다, 세상의 정의는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도 포함된다. 또한 노력을 하면 성공의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다는 희망도 우리의 삶을 추동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저출산이 문제라고 하면서 저출산 정책에 돈을 쏟아붓지만 그 이전에 우리 사회가 충분히 공정하고 정의로운지 반성해보지 않고서는 저출산 문제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저출산 대책이라고 출산 후 경제적인 혜택을 준다고 해도 매년 급속도로 추락하는 출산율을 지금, 우리 눈 앞에서 보고 있다. 

근본적인 원인, 사회의 구조적인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이렇게 서서히 고사할지 모른다. 

아빠 찬스, 엄마 찬스가 난무하는데 그런 찬스를 쓸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출산을 망설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헛된 정책에 나의 피 같은 세금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다.

세금을 생각하면 열이 머리로 몰리는 느낌이다. 이렇게 Calm down이 필요하다.


이런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하나, 세상을 신뢰하고 가치를 존중할 경우 나는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더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 '세상을 신뢰하고 가치를 존중할 경우'라는 단서에 나는 주목한다. 나훈아 님의 ‘테스형’을 듣고 깊이 공감한 나로서는 현재 세상을 신뢰하며 가치를 존중하고 있지 않다. 뭔가가 비이성적으로 흘러가고 너무 극단으로 치달으며 양분되는 것이 상당히 불편하다. 현 상황에서 나는 사회의 바람직한 가치를 찾지 못해서 내면화는커녕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다. 그래도 우리, 언젠가는 제정신을 차리고 이성적으로 행동할 날이 오겠지?


둘,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기 위한 에너지를 지나치게 많이 투입한다. 매사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조급함이 도사리고 있다. 품위를 유지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싶지만 현실에 적응된 자신을 ‘비우기’가 쉽지 않은 상태이다.

: 집에서의 나는 상당히 게으르고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지만 공적인 영역에서의 나는, 100%에서 120%를 쏟아붓고 있는 거 맞다. 사생활과 공생활을 통합하면 70~80%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는 공생활에서 이렇게 Fire 하다 보면 내 마음 같지 않은 속도에 혼자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낮추자, 낮추자, 에너지 게이지를 낮추자……

이렇게 납작, 에너지도 화도 낮추려고요.

셋, 때로 일을 할 때 지나치게 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내 일이라는 ‘당사자 의식’이 남달라서 그렇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제삼자 입장에 있는 사람에 비해 사건 당사자가 훨씬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사소한 문제에도 쉽게 짜증이나 화를 내고 이를 과격하게 표출할 가능성이 있다.

: 남 일에 화, 잘 낸다. 특히 내가 생각했던 가치가 훼손당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난다. 볼케이노 된다. 감정 이입도 (특히) 잘 된다.

하지만 나는 앞서 심리코드 첫 번째에도 나와 있듯이 감정 통제가 잘되는 사람이니까 내 속으로 천불이 나도 과격하게 표출되는 가능성은 상당히 낮(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가 훼손되었으면 화를 내자고 생각했다.

현대인들은 화를 내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다던 교수님의 말을 떠올리며 화를 낼 순간에는 내는 것이 건강한 것이라고 읊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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