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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Feb 21. 2021

그래서 나는 그렇다.

두드러진 다섯 가지 심리코드로 인해서 나타날 수 있는 특성

사람에 대한 판단을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사람’에 대해 특별한 거부 반응을 가질 수 있다. 사람에게 이런 느낌을 받으면 그의 다른 특징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맞아.) 마음에서 밀어낸다.(더 맞아.)

반대로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느낌이 들면 특별한 호감을 가진다. 그런 상대는 과대평가할 가능성도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등의 느낌과 관련된 사람을 접할 때[긍정적인 쪽이든 부정적인 쪽이든] 나의 사람에 대한 판단 오류가 가장 높을 수 있다는 뜻이다.(정곡을 찌르는구나......) 

앞으로 이런 느낌의 사람을 대면했을 경우 판단을 잠시 보류하거나 개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주위 사람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청취해볼 필요가 있다.

: 내가 소중한 것처럼 타인도 소중하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타인을 무시하고 까칠하게 대하는 사람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있다.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을 선호한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단한 헤아림의 마음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감동을 받는다. 예를 들어 직장 선배지만 같이 일할 기회가 없어서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회의 시간에 잘 모르는 후배의 다과를 챙기는 것을 보고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봤다. 아니, 혼자 속으로 격하게 감동했다. 심지어 마음을 헤아린 것도 아닌, 모든 사람은 '입'이 있는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호감을 가진다. 그런데 그 선배가 다른 일을 맡으면서 ‘짜증’을 내는 것을 보고 판단 오류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요즘이다.(으흐흑)

 

어렵지 않아요. 그냥 손만 뻗어주시면 된다고요.(네? 이런 상황은 아니라고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은 사실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훌륭한 자질은 잘 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하다. 사람은 상황의 동물이기에 맡은 역할과 위치에 따라서 얼마든지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생각해보면 나도 그러잖아. 그지?) 그 선배를 통해서 먼발치에서나마 다시 곱씹고 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람은 좋은 자질을 가진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 사람이 불변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므로 사람에 대한 판단을 함부로 내리지 않으려고 한다. 


윗사람을 대할 때는 특별히…

윗사람[직장 상사나 선배, 혹은 부모 등]을 평가할 때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나만의 평가 기준이 있다. 

윗사람이 ‘믿음직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 기준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윗사람은 전적으로 신뢰하고 존중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끼면 불만이 생기고 마음이 심히 불편해진다. 

그럴 경우, 윗사람의 피드백에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때로는 윗사람이 낸 중립적인 의견조차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기준은 나의 윗사람에 대한 은근한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믿어? 말어? 골머리를 앓는다......

: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기준은 사실 인간관계를 이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직장이라면 또 얘기가 다를 것 같긴 하다. 직장에서 믿음을 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신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기보다는 직장 시스템이라는 구조가 구성원에게 믿음을 주기에는 상당히 왜곡된 구조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적 네트워크에서는 여전히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자고 다짐하면서도 직장 상사에게까지 그런 잣대를 적용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회사에도 내가 좋아하는 상사와 선배는 있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믿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신’처럼 무조건적으로 믿는다고는 답할 수 없으리라. 


나만 알고 있는 나의 근심…

나는 ‘앞으로의 삶이 불안정해지면 어쩌나’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두려움이 매우 높다. 그에 따른 불필요한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상당하다.

하지만 객관적인 분석과 판단 자료에 의하면, 실제로 내가 걱정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상상하는 만큼 부정적인 정도까지 내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몰리지는 않는다.(외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몰릴 가능성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겠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였는데 말이지.) 

나에게는 그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심리적 힘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영역에서는 항상 나의 심리적 힘보다 더 많은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불필요한 걱정이다.

어두운 현실도 뚫고 나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있대.(저, 정말요?)

: 이 심리검사를 할 때 나는 불안과 두려움의 정점을 찍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너무 당연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분석 결과는 역시 내적인 힘이 현실을 잘 타파해 나갈 거라고 위로하고 있는데 사실, 내면은 그렇다 쳐도 당장 할 일이 없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고민은, 요동치는 현대를 살아가는 (전문직이 아닌)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는 고민이 아닐까.

앞으로 일어날 일은 아무도 모르는데 그것을 고민한다고 하는 것을 ‘망상’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결국 삶을 대신 살아주는 것은 없으므로 내가 스스로 나를 지키고 내 삶의 두려움을 컨트롤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하아, 갑자기 어젯밤 꿈에 회사에서 시험 치는 꿈을 꾼 것이 떠올라 실소가 나오지만 그래도 더 이상은 떨지 말자. 불필요하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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