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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 Dec 18. 2021

나는 시종이 아니다

시녀들-벨라스케스,1656년경

“거 신발에 붙은 게 뭐냐? 수염이냐?”

“아이고, 노비, 죄송합니다. 수염은 아니옵고 노비가 허둥대다가 그만 머리카락 자른 것을 신발에 붙이고 왔사옵니다. 눈을 더럽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흠(불편한 심기를 한껏 드러내며 마지못해), 용서 하마.”

중국 드라마에는 사극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사실 예전에는 사극을 무슨 재미로 보나 싶었다. 현대극을 훨씬 더 좋아하고 지금도 현대극을 더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 자꾸 보다 보니까 또 이게 나름 맛이 있다.

사극에는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 드라마도 있고 그렇지 않고 시대만을 현대가 아닌 과거로 돌린 것도 있다. 그런 것 중에는 당연히 판타지도 들어가나, 역시 판타지는 나와 거리가 멀고 시대적 배경만 과거로 돌린 것은 이제는 그럭저럭 재미를 느끼면서 보게 되었다.

현대와 가장 큰 차이는 계급제 사회라는 점이다. 왕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다. 그저 읍소하고 조아리고 절하고 무릎 끓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살아간다. 왕이 얼토당토 하지 않은 말을 해도 일단 그 안전에서는 크게 뭐라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넘어가고 나중에 ‘하오나’로 시작되는 말로 넌지시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신하는 아주 충신이라고 할 수 있다.

위 대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찮은 일에 (신발에 뭐가 붙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람?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극 중 환관인 노비는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왕의 용서를 애타게 기다린다. 이 외에도 사극 한 편을 보고 있노라면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치며 허리를 계속 굽히고 있는 대량의 신하들을 지겹도록 보게 된다. 허리가 약한 나로서는 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도 다행이고 궁 근처에도 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침대에 누워서 멋대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자꾸 보다 보니까 그 허리를 조아리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황제의 절대적인 군림이 옛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야,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놀고 먹던 경회루 사진은 없고 근정전 사진만.. 또르르

경복궁 경회루를 바라보면서 자못 근엄하게 신분제 사회인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는 나의 말에 친구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봤으나 뭐 회사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 아닌지 라는 반문으로 입틀막 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회사의 대표가 있다. 그가 오너라면 상황은 좀 더 심각하지만 하여튼. 회사의 대표는 하나의 권력이다. 회사 내에서는 최고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없던 카리스마도 생긴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호령한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릴 때에는 사람들이 더 긴장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정당한 이유로 아랫사람을 질타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꼭 대표만 그런가. 어느 조직의 장이건 어느 정도의 권력이 생기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권력욕이 작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정당한 사유로 질타를 당하는 것은 겸허히 수용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사람은 누구라도 완벽하지 않기에 본인만의 편협한 생각에 갇힐 때도 있고 아집을 부릴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성인군자들은 스스로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얘기한다. 

정당하지 않은 사유에도, 납득이 되지 않을 때에도 그냥 고개를 숙이고 따를 수밖에 없을 때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진 빠지는 순간 top 5 안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수평 조직을 외치고 서로 영어 이름을 평등하게 부른다 하더라도 회사에는 위계질서가 있다. 그건 세상 어느 조직이나 정도의 차이일 뿐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강신주 선생이 말한 것처럼 회사원은 현대판 노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주 까놓고, 나쁘게 말하자면.

노비. 사내종과 계집종을 이르는 말. 계급제 사회의 저 밑바닥. 양반이든 중인이든 어떤 주인에 '매여' 있는 몸이다. 고용계약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네, 바로 저로군요. 현대에는 그 방식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세련되게 바뀌었을 뿐, 그리고 언제든지 자율적으로 노비 신분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뺀다면 내가 사극을 보면서 한심하게 보고 있던 주종관계는 내가 매일 되풀이하는 직장 생활의 한 단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지 않아도 추운데, 서늘한 한기를 느낀다.

아, 너무 부정적으로만 바라본 건가.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니까, 빨리 자율적으로 나갈 수 있을 때 EXIT 하자고 경복궁의 근정전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from PRADO Museum]

회사에 3세가 온다는 소문이 돌 때마다 나는 이 그림을 떠올린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 프라도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분명히 봤을 텐데 당시 미술관의 어마어마한 컬렉션에 압도당해서 자세한 기억은 나지도 않는다. 이렇게 웹상으로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된단 말이지. 

누가 보더라도 공주임이 분명한 여자아이가 화면의 중앙에 하얀 비단 드레스를 입고 눈동자를 오른쪽 위로 올린 채 서 있다. 복숭아빛 볼은 오동통하고 가슴에 단 꽃은 생화일지도 모르겠다. 미취학 아동의 나이 정도로 보이는데 그야말로 금수저의 기운이 뿜뿜 뿜어져 나온다. 그녀의 그 기운은 그녀를 둘러싸고 시중을 들고 있는 시녀들에 의해서 더 고조된다. 무릎을 굽혀 공주의 눈높이에 맞춘 시녀는 마실 것을 건네고 있는 것인가?

“공주님, 모델 서 있느라 너무 고되죠? 이 코코아라도 드시면서 잠시 기분 전환을.”

이런 말로 공주를 달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주가 모델인데 벨라스케스가 왼쪽 뒤편에 서 있는 것도 미묘하긴 하지만. 공주 뒤편 벽에 보이는 거울에 반사된 왕과 왕비를 그리는 것일 수도 있다. 시각적으로 보면 그게 맞는데 이렇게 얽히고설킨 구도는 그림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 준다. 공주는 두 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거기에 커다란 개와 여자 난쟁이, 뒤편의 수녀님(복장이긴 한데 확실치는……)과 남자 한 명도 보이는데 이들도 분명 공주를 모시는 데에 부속된 사람들일 것이다. 공부와 놀이와 종교와 생활에 한치의 부족함이 없도록 왕과 왕비는 갖은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런 사랑 속에서 자라서인지 공주는 천진난만하다. 기생충에서 나온 것처럼 다리미로 쫙쫙 편 얼굴이지 않습니까. 

이들보다 비교적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믿고 싶어지는 것이 화가 벨라스케스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앞을 주시하고 있다. 잘 보이겠다거나 잘 그리겠다는 열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시녀들처럼 공주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모델을 못 서겠다고 '땡깡'을 부린다면 “그럼 저도 오늘은 이만”이라는 쿨한 인사를 하고 퇴장할 것만 같은 자유로움이 심드렁한 표정에서 느껴진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서 오랜 시간을 일했는데 그가 그린 왕가의 모습에서 미화의 흔적을 많이 느끼지는 못했다. 주걱턱은 주걱턱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 그렸고 지나치게 아름답게 ‘반올림’한 구석도 없으리라 믿어본다.(물론 사진이 없어 진실 확인은 어려우니 그냥 믿는 수밖에. 아니 반올림해서 다 이 정도로 나온 거라면 할 말 없음) 그런데 그가 ‘나는 왕의 명령에 의해서만, 왕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온다니 ‘브루투스 너마저’의 심정이 드는 동시에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림을 보면 속내는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짙은 의혹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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