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담하기 전에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걱정
심리상담 중에 종종 듣는 말이다. 상담실을 찾기까지 ‘갈까 말까’ 무수히 고민했고, 그 고민 끝에 ‘그래, 한번 가보자!’해서 왔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 중에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는 쉽지는 않다.
회사 내 부적응 문제를 호소하던 한 직장인은 ‘제 문제는 직장내 문제니까 어린 시절 경험은 묻지 마세요’라고 먼저 엄포를 놓았다. 몇 해 전에 우울증 진단을 받은 적 있다는 한 20대 여성은 ‘그때 어떤 부분이 힘들었나요?’라고 묻자,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내담자가 먼저 묻지 말아달라거나 말하기 싫다고 하면, 궁금하지만 일단 그러려니 한다. 어떤 사정에서건, 지금 시점에서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으려니. 그래서 캐묻는 대신 이렇게 묻는다. ‘지금 말하기 싫은 어떤 이유가 있나요?’
지금 떠올리면 힘들어질까 싶어서, 말하면 상담자가 편견을 가질까 두려워서,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무거운 비밀이라서,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말하기 싫다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말하기 싫은 이유’에 대해 묻는 건, 그 이유를 말하면서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경험을 묻지 말라던 내담자는 말한다. ‘예전에 상담할 때, 상담자가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계속 물어보더라고요. 그러면 기분만 나빠져요. 그게 지금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답답해지고, 지금 제가 겪는 일은 그게 아니니까요.’ 작년에 왜 우울증 진단을 받았는지 말하기 싫다는 내담자는 이렇게 말했다. ‘작년에 정말 힘든 일을 겪었어요. 제 인생에서 제일 잔인한 해였죠. 그걸 지금 말하기는 좀 힘들어요. 아직 말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내담자는 자신의 비밀에 다가설 준비를 하게 된다. 자신의 결정에 이유를 부여하고, 그렇게 자신을 이해하면서. 하지만 그 비밀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맞닥뜨려야 한다. 아니, 맞닥뜨리게 된다. 마음이란 압력을 싫어하는지라, 겉으로 튀어나오지 않게 숨길수록 더 튀어나오려고 안달이니까. 사냥꾼에게 쫒기는 토끼를 집안에 숨겨주면, 그 토끼가 잘 숨어있는지 계속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니까.
그래서인지 상담 관계가 돈독해지고 신뢰가 쌓이면, 어느 순간 이야기는 도마 위에 오른다. 원래부터 말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술술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어린 시절 경험을 묻지 말라던 아까 그 직장인은 학창시절 따돌림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소외될까 두려운 마음’에 관계에서 매번 긴장하게 되는 자신을 보았다. 긴장감에 말실수를 하게 되고, 쓸데없는 오해와 구설수를 만들어 회사 적응을 힘들게 했다. 작년에 우울증 진단받은 이유를 말하지 못하겠다 했던 내담자는 상담을 하면서 자신에게 가장 특별했던 사람과 이별했던 경험을 떠올렸고, 깊은 애도 과정을 거쳤다.
혹시, 남들에게 하고 싶지 않은,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는, 꽁꽁 묻어둔 이야기가 있는지. 자신만 아는 그 비밀 속에 ‘내가 숨겨둔 토끼’가 살고 있는지.
한때 내게도 지인들에게 숨겨두었던 ‘비밀토끼’가 있었다. 그 비밀토끼는 아버지, 택시 기사인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지금이야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내가 더 부끄럽지만, 그때는 심각했다. 언젠가 친구들과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택시요금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나왔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친구들은 툴툴대며 기사를 욕했다. ‘택시가 알면서 일부러 돌아간 거야! 돈 몇 푼 더 벌라고, 죄다 도둑놈이라니까!’ 그 얘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쪼그라 들었다. 친구들이 하는 욕이 모두 우리 아버지를 향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안 좋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한 열등감. 그 후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피해버렸다. 아마 그때 친구들은 내게 아버지가 없거나 계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대학시절 나는 다른 사람에게 꽤나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인정에 목말라있었고, 누구에게든 사랑받고 싶었다. 아버지를 숨겨두면서까지 ‘흠이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혹시라도 누군가 ‘너희 아버지 뭐하시니?’라고 물어볼까 봐, 내가 어색해하는 걸 누군가 눈치챌까봐. 비밀이 많은 사람이 그렇듯, 누가 찌르지 않아도 그냥 찔리고, 누가 쳐다보지 않아도 괜히 살피고, 쓸데없이 피곤했다.
혹시 당신에게도 숨겨둔 비밀토끼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으면 싶은 비밀. 혹은 떠올리기 싫은 순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는지.
묻어둔다고 다 묻히지는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 흐려질 수는 있지만, 감정으로 새겨진 기억은 지독하리만치 오랜 간다. 아무도 몰랐으면 싶지만, 자신만은 알고 있다. 느낌으로 감정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니까.
돌이키고 싶지 않은, 숨기고 싶은 과거가 무엇이건 간에, 혼자 꽁꽁 감춰두고 자신만 탓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상처를 입는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혼자 꽁꽁 감춰두고 ‘내가 그때 그렇지 않았더라면...’하고 후회와 번뇌로 힘들어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한번쯤은, 혼자서든 상담실에 와서든, ‘과연 정말 그럴까?’에 대해 의심을 해보기 바란다. ‘과연 그 때 그 일이 정말, 죄다, 내 잘못일까?’
혹은 비밀토끼를 숨겨둔 이유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봐,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굳이 이제 와서 말해 뭐해’처럼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이유라면, 자신에게 한번쯤은 물어보기 바란다. ‘그래서, 내 마음은 괜찮은 거야? 그냥 묻어둬도 괜찮겠어?’
아무도 몰랐으면 싶지만, 단 한명,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숨겨야할지 드러내야할지 고민이 된다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기 바란다. ‘어떻게 하는 게 나한테 득이 될까?’ 만약 마음에 묻어두는 게 자신에게 득이 된다면 그리 해도 좋지만, 숨기느라 애를 쓰다가 손해 보는 게 더 많다면,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는 게 더 괴롭다면 드러내는 게 낫다.
숨겨둘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해줄 사람,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럴 수 있었겠다’라고 마음으로 이해해줄 사람, 내 이야기에 진심으로 궁금해 할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더 늦기 전에 꺼내보기 바란다. 마음이 더 외로워지지 않게.